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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Oct 23. 2021

어둠의 심연 / 조셉콘래드 / 1899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은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써 내려간, 인간 본연의 내면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행위 등을 묘사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조셉 콘래드는 어려서부터 불우한 시절을 보내다가, 일찍이 선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선장 및 선원으로서 세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현지 경험을 쌓게 된다. 


  어둠의 심연은 1800년대 후반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를 무대로 한다. 작가는 제3자로 등장하며, 경험담을 회고하는 주인공 말로우(Marlow)를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일종의 액자구성인 셈. 벨기에의 무역상에 소속된 주인공 말로우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선장을 대신하여 콩고강으로 파견을 가게 되고, 그곳의 일이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았던 콩고의 상아를 운반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품의 초반부터 19세기 후반의 치열했던 유럽의 식민지 확장 경쟁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아프리카'라는 원초적인 이미지와 천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상아', 그리고 '침입자'의 죽음이라는 코드가 얽혀 작품 전체의 이야기를 압축하는 듯하다. 새로운 항해와 미지의 장소로의 모험을 기대하던 주인공은 콩고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식민지배가 낳은 여러 상처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원시림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가 본래의 임무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하나의 권력, 혹은 신으로 존재하는 커츠(Kurtz)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끝내 그를 찾아내어 구출(혹은 회귀, 발견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수도...)하는 것으로 커다란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나는 그 밀림이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속삭여 주었으리라고 생각하네. 그는 이 거대한 고독과 사귀게 될 때까지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밀림의 속삭임은 그에게 거역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일 수 있었던 거야


  이 작품은 당시 유럽 열강들의 잔혹한 행위들과 식민지배를 받던 지역의 원초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자행되던 것들에 대해서 독자들은 정당성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제국주의라는 시스템의 종말을 검증한 바 있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20세기 이전에 발표된 이 작품이, 현대에 이르러서 더욱 많이 회자되고 수 없이 많이 읽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러한 서구 열강의 지배자적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침략에 대한 부조리함, 교만함, 그 속에 숨어있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근원에 매우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바라본다. 침략과 쟁취의 권력이 스스로 정복지에서 돌연변이 포자가 되어 축축한 원시림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형태의 암흑으로 자리 잡으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한 것이다. 마치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떠한 암 덩어리의 종양처럼 이름모를 악의 근원, 그 어둠의 심연은 상대를 정복하기도 하고, 혹은 그곳에 정착하기도 하고, 스스로 변화하며 결국 그 주변과 함께 새로운 형태로 죽어가는 것이다. 콩고의 깊은 원시림에 정착한 커츠는 오랫동안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았고, 결국 그 속에 말려들어가는 방식으로 합일화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커츠의 행위는 당시 니체가 말했던 어둠에 대한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 -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일부 인종차별적인 묘사라든지 혹은 작가의 애매모호한 - 일종의 지배자적인 입장에 대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넘은 시기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충분한 맥락을 헤아릴 수 없음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극찬을 받고 시간이 갈수록 많이 읽히는 이유는, 그 누구도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한 지배자들의 모습과 인간 내면의 어두운 모습을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했다는 것 때문이리라.


이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 행위가 아닌가


  사실 이 작품은 소설 원작도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명확하게 원작가의 의도가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의 비난을 받으며 미국에게는 일종의 수모를 안겨준 베트남 전쟁이라는 배경을 통해서, 감독은 제국주의 열강의 무자비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었으며, 잔혹한 무기들과 명목 없는 지시, 복종을 통해서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어둠과 악이 어떻게 스며드는지에 대한 연출의 노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끝부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처한 여건과 상황, 시대와 시간에 따라서 이쪽이 될 수도 있고 저쪽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과 맹목이 판을 치는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삶을 살고 있다. 21세기가 되고 나서도 이 세상에서 제국주의적 지배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세계의 여러 곳곳에서 전쟁에 대한 광기와 전체주의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불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민족주의니 국가주의니 하면서 아직도 관념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분하기 위해서 인종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행위가 빈번하지 않은가. 전 세계가 수많은 전쟁들을 치르고 나서도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을 만큼의 핵무기들을 보유해놓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나라와 인종들을 대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와 다른 인종, 내가 접하지 못했던 문화, 평소 알지 못했던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 아직도 요원한 이때를 아쉬워하며 리뷰를 마친다. 


지옥의 묵시록은 1979년 개봉되었다. 당시 배트남전이 끝난 직후라서 전쟁에 대한 각성과 그 정치적 울림이 매우 컷다.


깊은 원시림을 탐험한다는 느낌을 매우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원작의 내용을 대부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수준높은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커츠(Kurtz)역은 말론 브랜도가 담당하여, 그 목소리와 아우라를 훌륭히 소화하였다.


어둠의 심연을 찾아 들어가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으로 감독은 황금종려상을 비롯하여 전 세계 수 많은 상을 수상하게된다


어둠을 향한 묘한 욕구와 호기심, 또한 그 공포와 비현실성에 대한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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