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각자의 원시림과 부락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시간만 나면 들여다보고, 가꾸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곳은 완전한 유토피아.
부모라는 여행자는 아무런 예고 없이 그 원시림을 방문한다.
여행자의 수준에서 보면, 그곳은 고쳐야 할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고, 비합리적인 것도 많고
지적질할 것 투성이다.
바로 그 순간, 그곳의 원주민과 여행자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정착민에 대한 몰이해.
위계적인 시각,
정복자적인 위선이 원시림을 파고든다.
'이것이 더욱 효율적이야'
'이것이 더욱 위생적이야'
'이것이 더욱 가치있는거야'
'이것이 더욱 편리한거야'
아이는 어느새 유토피아의 문을 닫고, 방문자를 받지 않기 시작한다.
"누가 나의 세상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
어느 날, 부모의 모든 권위와 근심을 내려놓은 뒤
운 좋게 자녀의 세상에 입장을 허가받은 순간
순전히 아이의 입장과 시선에서 대화를 시작해본다.
아이는, 어디엔가 숨겨놓았던 마이크를 꺼내고
난생처음 아빠 앞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본다.
평소 들어볼 수 없었던 딸아이의 앳된 노랫소리.
목에 핏줄이 올라오고, 높아진 톤은 미소를 따라 빙글거린다.
고정관념과 색안경을 걷어내고 탐험해본 원시림은
소박하고, 나약하고, 여리고, 작은 행복들의 집합이었다.
내가 한참 키를 낮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귓가에 손바닥을 모아야 들리는 소리들,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다가오는 제스처들.
원주민은 자기의 공간을 여행자에게 소개하면서 너무 즐거워했고,
단지, 오로지,
그것만으로 행복해하였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여행자는 오늘도 터벅터벅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