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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y 26. 2022

결과론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인지부조화, 확증편향, 사후확증편향

  나이를 먹고, 오만가지 사회적 경험을 쌓고,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다 보니 어렵고 따분하게 들리던 심리학 용어들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옛날에는 TV 뉴스와 종이신문 만으로 세상을 진단할 수 있었지만, 21세기부터는 일반 개개인들이 이 세상에 넘쳐나는 정보들을 쉽게 마주하다 못해, 오히려 필요한 정보를 걸러내서 섭취해야 하는 능력이 요구될 정도이다 보니, 사람들이 더욱 똑똑해져 가는 탓도 있다.


  나는 어려서는 인지부조화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동일한 경험 속에서 느끼는 의식이 매번 -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으로 다가왔던 것 같고, 결국 내가 그러한 의식의 오류를 깨닫고 편향된 사고를 하는 습관을 고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의 소모가 지난 뒤였던 것이다. 인지부조화라는 것은 알고 보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떠안고 살아야 하는 자기기만의 족쇄일지도 모른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것은 한마디로 자기 합리화이다. 사람에게는 '신념'이라는 내부적 인지 요소와 '행위'라는 외부적 인지 요소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나면 인간은 불편함을 느끼며 그 사이를 좁히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한 여우가 포도나무 밑을 걸어가다가 자신이 점프하면 포도를 먹을 수 있겠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점프를 해보지만 결국 포도를 먹을 수 없는 '행위'에 이르러, 자신의 능력이 안되어 포도를 못 먹었다는 불편함(신념과 행위 사이의 커다란 차이)을 없애기 위해, 저 포도가 원래 신 포도였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못 먹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신념을 행위 쪽으로 옮겨서 그 인지 간의 부조화 격차를 줄인다는 비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휴거를 외치던(신념) 일부 사이비 종교 집단의 경우, 휴거일이 닥쳤어도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행위), 휴거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의 불편함(신념과 행위 사이의 커다란 차이)을 없애기 위해, 휴거일이 나중으로 미루어졌다며, 이번에는 행위를 신념 쪽으로 옮겨서 그 인지 간의 부조화 격차를 줄였다는 실화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지부조화라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의 도처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개개인들의 사소한 인지부조화들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한 미덕으로 권장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을 봤지만 낙방했을 경우, 만약 그 친구가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는 운이 없어서 혹은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떨어졌을 것이라고 옆에서 위로해준다면 그 행위는 예의 바르고 우의 있는 것으로 칭송될 것이다. 또한 해외사이트에서 가방을 하나 구매하였는데 흠이 있고 하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복잡한 클레임과 환불 절차에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나마 이만한 것을 얻은 것도 다행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 더 편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인지부조화는 우리의 일상에 널려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지부조화를 조금 더 심오하게 들여다본다면 역시 '패스팅거의 실험'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 더 노골적이고 분석적으로 규명한 실험으로, 개개인들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그에 걸맞지 않은 결과로 드러나는 것에 얼마나 거부적인지를 알 수 있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그 실험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생략하더라도, 여우와 신포도의 경우에 다시 빗대어 본다면, 이는 여우가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포도를 따먹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포도가 매우 신 포도였다고 하였을 때, 그 여우는 애당초 그 포도를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포도를 먹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을 만들어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여우가 포도를 먹건 먹지 않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행위 사이가 얼마나 잘 일치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라는 반증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신념과 행위 사이를 일치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뿐, 인생의 9할은 불일치의 연속인 것이다. 야구선수의 타율도 3할이면 성공한 셈이라고 하지 않은가. 역시 인생은 인지부조화의 물결 속에서 헤엄치면서 살아가는 그 과정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인지부조화보다도 조금 더 우리의 일상에서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심리적 장애요인이 하니 있다. 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나 사실은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봐도 커피숍이 들어오면 장사가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골목에, 누군가 커피숍 장사를 반드시 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골목의 장점만을 보고, 생각하고, 확신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옆에서 누가 말려도 바로 그 자리에 커피숍을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너무 커서, 자신에게 불리하고 불편한 정보는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만을 움켜쥔 채 기어코 그 커피숍을 오픈하게 되는 것이다. 확증편향 역시 우리의 일상에 널려 있지만, 무언가 강한 열망과 고집과 아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의식구조라는 점에서 인지부조화와는 약간 다른 양상을 띤다.


  더불어, 사후확증편향(hindsight bias)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일종의 결과론적인 것으로, 어떠한 사건의 결과가 일어났을 경우 그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편의에 맞도록 과정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응원하던 축구팀이 경기에 졌을 경우 자신이 좋아하지 않던 선수에 의식을 편향하여, 감독이 그 선수를 기용했기 때문에 졌다고 확증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자녀가 시험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평소 자녀가 놀던 모습과 늦잠을 자던 모습에 편향하여 오로지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확증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무언가 과정을 눈여겨보고, 그것이 어떠한 길로 가게 될지를 분석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입장과는 달리, 결과를 먼저 확인하고 과정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후견지명(後見之明)의 오류는, 다소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내부적 집단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지부조화와는 달리, 타인이나 다른 사건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에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인지부조화이건, 확증편향이건 이러한 것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문명인들에게는 역시나 필요악 같은 존재이다. 나 스스로도 그것을 원할 때가 있고,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그러한 오류를 범할 때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삶을 살아가는데 참 피곤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과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모든 인식들이 계속 변하면서 해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관을 확립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물론 때와 장소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관과 입지를 바꾸면서 카멜레온처럼 살아야 하는 일부 정치인들이나, 오로지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들, 혹은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들만 수집해야 하는 변호사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의 이로운 면만 부각하는 법조인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반인들이라면 인지 간의 부조화가 발생할 경우, 신념이건 행위이건 한쪽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것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포도를 따지 못했던 여우가 집에 가서 열심히 점프하고 있을 것을 우리는 기대하게 되지 않는가. 응원하던 스포츠팀의 패배가, 내가 맘에 들어하지 않던 선수 때문이라고 외치던 사람은, 다음 경기에도 그 선수가 나왔다고 하여 그 팀을 응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에는 발전된 시민의식과 민주화의 분위기 때문인지, 정치인들이나 유명인들의 발언을 시민들이 올바르게 파악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거봐라 내가 뭐랬냐'라는 식의 체념과 옹졸함이 잘 통하지 않는다. 사회가 성숙하게 나아가고, 집단지성이 어느 정도 기틀을 갖추고 탄탄하게 자리를 잡으려면, 인지부조화나 확증편향보다는 결과에 따른 인정이나 깨끗한 승복의 자세,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것들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 이 시간도 그렇고, 앞으로도 역시 가족, 친지, 직장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인지부조화나 확증편향 같은 이기적인 의식구조가 여전히 팽배할 것이다. 이것을 단절할 수는 없다. 다만, 개개인들이 보다 겸손하고, 인내적인 자세로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위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 사이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결과를 뒤집는 것이 아닌, 최초의 출발과 과정에서부터 노력하고 신중을 기한다면 이 사회는 결과론 중심의 사회가 아닌, 과정론 중심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지부조화나 확증편향 같은 결과론은 나를 카멜레온으로 만든다. 시시각각 자신의 컬러를 바꾸면서 지내야 하는 카멜레온은 오래 살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다면, 그 누구와 대화를 하건, 그 어떠한 기사를 읽건, 그 어떠한 경험을 하건 간에 결과 아래에 숨어있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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