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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22. 2022

인용문 출처 탐험기 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EBS 지식채널e

  EBS의 지식채널-e 시리즈가 잘 나가던 당시 2014년 즈음,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짧은 영상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공감과 정의의 시대를 갈망하는 시대적 요구와 성숙한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반영된 문화적 산물이라고 해두자. 해당 영상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의 내용을 근거로 만들어졌는데, 나도 최근 용감한 여성 정치철학자의 저작들이 궁금하여 사생팬이 된 이후로 조금 더 책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아이히만의 살인가스열차 관련


  그런데, '아이히만이 고안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살인 가스열차'와 관련한 영상 속에서의 워딩은, 인터넷 자료에서건 혹은 책에서건 그 출처를 찾기가 힘들었다. 아이히만의 재판 판결문은 인터넷으로 구할 수가 있지만, 영문으로 되어있으며 법조계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접근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아이히만이 피소된 혐의 중에서도 살인가스열차 제작으로 인한 사항이 있었는지 쉽게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일부 판결 내용문 중에 '가스차량(gas van)'으로 유대인을 살인하던 나치의 행위에 조력했다는 판결의 문장이 존재하지만, 그가 화물차나 기차에 가스장치를 부착하도록 설계하여 차량 이동중에 유대인을 살인할 수 있도록 했다는 내용은 찾기 힘들다. 화면 문구의 내용은 어쩌면 그와 같이 근무했던 나치당원의 회고나 증언으로 인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해당 영상을 아직까지도 시청이 가능한 EBS 사이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청자 불만 전담용 이메일(hotline@ebs.co.kr)을 통해서 문의를 해보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나의 질의는 회신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 영상을 근간으로 하여 만들어진 [어린이 지식e 시리즈]라는 책이, 동일하게 EBS라는 브랜드에 의해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식채널e 시리즈들의 내용들을 어린이들이 알기 쉽도록 만든 것인데, 이번에는 이 책의 제작과 출판부 쪽에 문의를 하기로 맘을 먹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로 역시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영상제작과 출판 쪽은 엄연히 다른 회사입니다. 당시 영상을 근간으로 책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현재 해당 제작진들 연락이 불가하고 확인이 어렵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나는 EBS의 영상을 감동 깊게 시청한 시청자로서, 혹은 나의 아이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의 근거들을 알려주고 싶은 학부모로서 단지 아이히만이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고안했다는 내용의 출처가 어디였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인데, 이 내용을 다룬 막강한 기업체에서 공영 방송영상과 도서까지 만들어놓고도 그 출처를 설명해주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교육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명한 책들의 객관성에 대해서 점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건 나의 피해망상일까. 물론 아이히만이 가스장치가 부착된 열차를 만드는 것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가 유럽지역의 유대인 이주 담당 수장이었으니까. 그래도, 무거운 주제의 영상을 만드는 입장에서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작은 출처표기라도 좀 해주었으면 더욱 완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나 아렌트의 어록 관련



  이 영상과 더불어, 몇 년 후 TV 교양 예능에서 공식적으로 다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폭발적으로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한나 아렌트의 언어가 무한 증식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면서, 다수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올바른 생각 능력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가치를 전 세계인들에게 다시 일깨운 것으로 유명하다. EBS의 지식채널-e 영상과 어린이지식e 도서에서는 동일하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어록을 발췌하였다고 표기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워딩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라는 것인데, 생각이 없으면 말로 끄집어낼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올바른 행동도 할 수 없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원문을 살펴보면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라는 표현으로만 되어있으며, 이는 생각과 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한나 아렌트의 어조를 고려해볼 때, EBS 측에서 '행동'이라는 코드를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맥락이니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하고 유명인의 어록을 차용할 때에는 단어 하나, 획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아이히만의 경우 나치당원의 고위관리 책임자이고 그의 업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그의 명령과 말(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나 아렌트의 경우에는 생각과 언어의 두가지 결합에 중점을 둔 것이다. 고위관료가 채찍을 들고선 플랫폼에서 직접 '행동'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이히만이 굳이 직접적인 행동할 필요 없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상식적인 언어로 명령만 제대로 했어도 비극의 정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히만의 판결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단어의 1획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언어는 아주 조금만 틀려서도 곤란하다. 철학의 대가인 소크라테스의 말로 대변되는 그 수많은 유언비어들도 알고 보면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는 말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발언은 연도의 앞뒤만 구분해봐도 출처 없는 유언비어임을 알 수 있다. 미디어나 대중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워딩은 기본적으로 시청률과 광고와 깊은 관련을 갖기 때문에 더더욱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기에는 통쾌하고 감격스러울지 몰라도, 그 말을 정확하게 누가 했는지는 아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역사적 인물들의 족보 없는 명언들이 출처도 없이 얼마나 많이 인터넷에 퍼져있는지를 알게 되면 지금까지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뒤통수 맞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언어의 가변성과 서로 간의 입장차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커다란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집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랬다고 하더라~' 혹은 흔한 요즘 말로 '~카더라~' 식의 유언비어는 전하는 입장이나 전달받는 입장이나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 유언비어와 익명의 공격으로 삶이 피곤한  시대에, 역사를 배우고 진실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적어도 사실에 기인한 발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EBS  글을 읽고 있다면,  시원하게 뭐가 뭔지를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습기가 올라오는 초여름, EBS에 실망한 아재의 넋두리 끝.



<참고>

1. 어린이 지식e 6 (역사와 인물 편) / 이비에스미디어(주) 발행, 지식채널 판매. 2014

2. EBS 지식채널 아이히만 그가 유죄인 이유(회원가입필요)

https://bit.ly/3HILB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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