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는 5남매를 두었다. 첫째인 장남을 포함한 아들은 둘이며, 나의 어머니를 포함한 딸은 막내를 포함하여 셋이다. 그분은 일제강점기의 제주도 사람이었으며, 그 시절의 분위기가 대개 그러하듯 남아선호와 가부장 문화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첫째인 장남은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하여 국내 이름난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중매로 선을 보고 결혼을 하였고, 이내 곧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자기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더랬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같이 지냈는데, 나에게는 큰 외삼촌인 그 첫째 아들의 박사학위논문을, 외할머니는 무엇엔가 들씌워진 사람처럼 극진하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abstract... 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그 검고 네모반듯하며 무거운 영어 논문은 아마도 외할머니에게는 분명 인생의 고난을 보생 해주는 모노리스이자 신줏단지였으리라.
큰외삼촌이 유학생활을 완전히 마치고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이 눈앞에 선연하다. 외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애지중지하는 미국 초일류 대학 졸업생인 첫째 아들 가족을 위해서 갈비찜을 비롯한 산해진미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마련하셨다. 외할머니는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드는 내내 예민해져 있으면서도 신이 난 듯 보였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이것저것을 시키면서도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정에 담고 계셨다.
아니나 다를까, 큰 외삼촌의 둘째인 남자아이는 신발을 신고 곧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와 이리저리 거닐어, 당시 미국식 문화의 직설적인 향기를 발산하였다 . 첫째인 장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는데,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차분한 성품이었으나 어색한 모국어 속에 섞여있는 영어식 억양이, 서울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정서를 멈칫멈칫하게 하였다. 외할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같은 제주도 출신의 며느리는 아주 반가운 얼굴로 진수성찬을 차린 외할머니께 첫인사의 말을 과장하여 건네었다.
"아이고, 어머니 뭐 이리 많이 차렴수꽝게, 우린 비행기에서 많이 먹었수다. 힘드시게 뭥..... 할 것도 어신디, 우리는 양... 아이고.... 미국에서는 양... 고기는 질리도록 먹으멘 마씸... "
당시 한국에서 비싸고 귀한 음식과, 미국에서는 흔한 음식에 대한 서로 간의 의식이 충돌하는 순간의 그 어색함을 나는 잊지 못하여 수십 년 동안 뇌리에 간직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귀국한 큰 외삼촌네 가족은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대전에 있는 대덕연구단지의 직원 아파트에 따로 정착하였다. 80년대 말 그곳은 우리나라의 실리콘벨리였으며,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연구소를 만들고 인재양성을 하던 곳이었으니, 내가 가끔 그 집에 놀라가서 느꼈을 부러움은 말로다 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내가 얹혀살았던 외할머니댁은 가세가 기울어 너무 처참한 지경까지 무너졌고,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이모들과 같이 살면서 독자적인 생존의 모습을 갖추어야만 했다. 당시, 집이 통째로 압류되어 미아리의 쓰러져가는 단칸방으로 내몰리게 되었을 때,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이 길거리 육교 아래에서 한숨을 쉬어가며 서로서로 부모님을 어떻게 모시고 갈지, 남아있는 가족들을 누가 분담하여 데려갈지 서먹하게 툭툭 말을 내뱉던 모습이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당시 작은 외삼촌은 줄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었고, 큰 외삼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며느리들의 원성도 있었을 테고, 어려서 외할머니의 애틋한 돌봄을 누리지 못했던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들이 외삼촌들의 독립적 의식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결국, 외할머니댁은 그에 딸린 식솔들과 함께 아들들과 따로 떨어져 사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내가 모르는 생활비의 보조라든지 노인들의 노동, 가족들의 여러 돈벌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으면서도, 아들들에게 효심스런 대우를 받지 못했으면서도, 큰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신뢰하고, 다른 형제들과 차별하여 위해주었다. 외할머니의 5남매 중 4남매는 그러한 남아선호, 혹은 장남 선호의 망령과 문화에 평생을 투덜거렸고,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집을 나가 있거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기가 일쑤였다. 비단 그것은 남녀 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의 문제도 똑같은 양을 포함하고 있었으니, 이는 모두가 외할머니, 혹은 시대적 요구가 만들어놓은 씨앗과 분위기였을 것이다.
큰 외삼촌은 머리가 좋고 학업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지만, 가정을 이끌어가거나 생활을 영위하는 경제력, 혹은 저축이나 투자 같은 것에는 진부하고 무딘 감각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다가, IMF라는 절망적 방어본능을 요구하는 임기응변의 생존 몸짓에는 매우 서툴러서 회사에는 말 한마디 못하고 명예퇴직으로 짐을 싸들고 나왔던 것이다. 큰외삼촌은 내가 얹혀살고 있던 외할머니 댁에 자주 찾아와서 가족들에게 신문이나 잡지 같을 보다가 혹시 연구원 뽑는 공고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다든지, TV에서도 혹시 대학교 같은 곳에서 교수를 채용하는 내용이 나오면 전화를 달라는 식으로 우스꽝스러운 부탁을 비현실적으로 뱉어놓고 돌아가고는 하였다. 도대체 우리 같은 가난뱅이가 무슨 재주로 큰외삼촌의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그분의 현실감은 정말 안타까웠던 것이다.
내가 얹혀살았던 외가댁을 먹여 살리고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일으킨 것은 아들들이 아닌, 나의 어머니인 장녀 한 명의 노력이 컸다. 외할머니의 장녀는 이혼을 포함한 말 못 할 인생의 개인적 사연을 모두 안으로 삼키고 십수 년간 타지에서 여인의 몸으로 남성이 받을 만큼의 돈을 벌어가며 나를 포함한 나의 동생, 그리고 외조부모와 이모들의 생활비까지 모두 감당하였던 것이다. 둘째 아들인 작은 외삼촌도 여러모로 박살난 가정을 도왔지만, 외할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큰 외삼촌 쪽은, 그동안 차별되어 받들어졌던 숭배와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릴 정도로 자신의 부모에게 냉담했다는 말들이 식구들 간에 계속 오갔던 것이다.
어렵던 시절, 해외 유학파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하던 큰 외삼촌네의 집안은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그분의 자녀들도 넉넉한 경제적 보조와 해외유학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생활전선에 맞부딪쳤을 때에는, 일상에 대한 임기응변의 재치와 독립적인 생활력과 투철한 생존 의지가 항상 부족했다. 잡초처럼 자신의 인생을 마련하는 탄탄한 독립심과, 부족함을 느끼고 갈망하고 쟁취하려는 의지는 아마도 교육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아흔이 훨씬 넘은 나의 외할머니가 신처럼 받들어 모시던 장남의 그 어떤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된 것은, 근 20년 이상 그분과 함께 살았던 나의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대소사는 딸들과 둘째 며느리가 챙기느라 바빴고, 외손자와 외손녀인 나와 내 동생이 잡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큰 외삼촌의 얼굴은 이미 돌아가신 외할머니보다도 더 늙고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남아선호라는 정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 채 도도하게 찬란한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외동딸을 낳을 때에도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하나 더 낳으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은 아들이 하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외동딸을 낳은 후 근 십 년 이상 가족 친지들과 만나는 날이 있을 때마다, '남자는 낳아봤자 쓸모가 없고 우리 집안의 이 괴이한 남성의 핏줄은 나의 시대에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외동딸만 하나 낳은 것을 천운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밖으로 내뱉고 싶어서 항상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아내 쪽의 많은 형제들의 경우를 봐도, 지인들의 수많은 가정의 대소사 이야기를 들어봐도, 우리 집안의 그 많은 삼촌과 이모들의 경우를 봐도, 집안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경조사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옹기종기 모여서 전화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가까스로 실마리를 잡아내고 우왕좌왕하면서도 끝내는 문제를 해결해내는 것은 결국 여자들이었다. 아들들이라고는 어디 얼굴 한번 보이지 않다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영정사진만 들고 걸어가는 것뿐, 상을 차려주면 엉금엉금 기어들어와서 젓가락 숟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씹고, 술잔을 여러 번 기울이고, 끝내 스스로 하나도 치우지 않고 자리를 일어서는 알 수 없는 덩치 큰 동물들이었다. 나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인생 절반을 살면서 이 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남아선호는 실체도 없고, 이익도 없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비극이라는 것을.
마흔 중반을 넘긴 나는 명절 때 외가 친척들을 만나면 주로 외숙모나 이모들과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어렸을 때 같이 힘들게 고생하면서 일상을 감내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그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내가, 당시 차별받고 은근히 따돌림당하면서 지냈던 그 여인들의 시간들을 하나씩 정확하게 끄집어내면 모두들 너무 신기해하고 끝내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여인들의 보이지 않는 고심과 갈등과 문제 해결 의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내 동생도 우리 어머니도 모두 즐겁게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어야 한다. 이제 아들에게 좋은 집을 물려주고 그 며느리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 집안 행사에 강제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는 그 어떤 며느리도, 그 어떤 사위도 양가 부모를 모시고 살지 않는 시대이며, 제사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여인들만 모여서 김장을 하고 전을 부치고 고사리를 볶던 시기는 지났다. 김치는 사 먹는 것이 더욱 싸고 맛있고, 명절 음식은 배달을 시키면 시간 절약, 노동 절약, 심지어 돈도 절약이 된다.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려면 여자 남자 구분 없이 서로 공평하게 음식을 장만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다들 모여서 똑같이 돈을 걷고 음식을 시켜먹던지, 음식점을 가던지 하면 된다. 아직도 어느 집안에서 설거지는 여자만 하고 있고, 남자들은 밥 먹고, 술 마시고, 후식으로 과일을 집어 먹는 집안이 있다면, 그 당사자들은 몰라도 그 이후의 세대는 불행한 유산을 짊어질 것이 뻔하다.
아무리 집값이 높고, 애 키우기 힘들고, 취업이 힘들다고 해도 그러한 이야기는 이집트 파라오 시절부터 있어왔던 이야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큰돈을 해주거나 고생이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적 혜택을 덥석 건네준다면, 그것은 자녀의 생존과 독립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시부모가 집을 하나 마련해줬는데, 그것을 빌미로 시도 때도 없이 부르고 간섭해서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는 와이프의 지인들 이야기를 건네 듣고 있노라면, 계산적으로 주고 부려먹는 부모나, 덥석 받고 투정 부리는 자녀들이나 안타깝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도 해본다.
남아선호는 이제 비극이다. 가부장제는 무너졌다. 애매하게 전통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한국 남성들의 운명이란, 끝없이 무언가를 해주고 걱정해야 하는 것들일 뿐 막상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빚 밖에는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그나마 학교 선생이라도 안되면, 혹은 공무원이라도 안되면, 혹은 출산휴가가 보장된 기업에라도 취직하지 못하면 돈 있는 남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결혼도 못할 것이라는 전통관념이 아직도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지만, 실상은 알고 보면 여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젊은 사람들의 결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 남아선호 사상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서로 각각 독립된 존재로 자연스럽게 만나서, 서로 동일하게 가사를 분담하고, 가정의 절반을 책임지고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서로를 보완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떳떳하고 에너지 있는 독립의식을 물려줄 수 있다. 하나의 생명에 주어진 고귀하고 값지고 활기찬 자신 한 명의 가치. 건강한 이기주의와 긍정적 현실주의를 철저하게 숙지하고 탄탄하게 자신의 실력을 쌓아서 어떻게든 본인 스스로 1인분의 생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