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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Nov 02. 2022

첨예(尖銳)의 문제

날이 갈수록 얇음과 날카로움은 조장된다. 아마도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액정이나 모니터 제조사들 쪽에서 추구하는 것들이리라. 높은 해상도, 뚜렷한 샤프니스, 칼날같은 정교함, 매끈하고 잘 빠진 디자인. 이러한 모든 것들이 첨예(尖銳)의 문제에 놓인다.


물질적으로는 그렇다고 하지만, 정서적으로도 첨예(尖銳)는 강조된다. 인터넷과 디지털 혁명기에 들어서 더욱 그렇다. 명확하고 상하전후좌우로 가를 수 있는 의식을 요구하고 흑 아니면 백, 이항대립의 그 날카로운 경계선을 확인하라는 강요가 있다.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만연하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물건을 하나 산다고 치자. 그러면 물건과 관련한 물음도 생기고, 맥락을 보유한 답변도 기대된다. 하지만, 이제 일하는 젊은이들은 매뉴얼과 정해진 대답 이외의 언어에 귀찮음을 느낀다. 본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면, 본인의 수당이 올라가는 문제가 아니라면, 본인의 근무시간이 단축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여타의 언어조차 낭비라고 치부된다. 살을 베이는 듯한 날카로운 입장의 선택.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첨예(尖銳)한 선긋기에 능숙해진다.


아이폰과 갤럭시는 해마다 자사의 카메라 해상도가 높다고 자랑을 하며 제품을 광고한다. 사실, 이러한 해상력의 문제는 2000년 디지털카메라의 부흥 때부터 시작되었다. 휴대폰을 사용하는 그 누구도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 그 천만 개의 픽셀 수. 손바닥 안에서 보이는 작은 이미지는 그렇게 높은 해상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 이미지라는 것.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의 첨예(尖銳)가 아닌 내용을 보고 반응하지 않는가.


아주 오래전 구입해두었던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필름이 최근에도 출시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여, 가족들이 모인 장소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셔터를 누르고, 즉석으로 인화된 사진을 나누어 준다. 생전 이러한 물건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작고 흐릿한 이미지에 행복해한다. 문제는 날카로운 해상력이 아니라 뭉툭한 이야깃거리인 .


단순하고 선명한 윤곽, 칼날 같은 모서리, 돌출이 없는 표면, 닦기 쉬운 재질. 하지만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땀 흘리고, 냄새나고, 수시로 씻어줘야 하고, 형상 없는 주름을 가지고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는 그야말로 부정형의 두툼하고 투박하며 거끌거끌한 존재. 인간이 먹고 자고 싸고 더러운 동물인 한, 손바닥과 눈동자는 커지지 않는다. 손바닥과 눈동자 크기 이상의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다.


가을 날씨가 좋아서 걷다가 무심코, 아주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여인에게 인간의 언어를 흘려본다. 하지만, 보낸 쪽도 받는 쪽도 투박하고 흐릿하며 거칠고 돌출된 정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편한 시대니까.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있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가족사진 하나. 그것은 아무리 선명하게 스캔을 하고 확대를 해도 첨예(尖銳)해지지 않는다. 어렵고 고단했던 시절의 피곤함 만큼이나 낡은 사진의 표면은 나로 하여금 고통을 함께한 사람의 거친 손마디를 연상케 한다. 울퉁불퉁한 바닥, 어질러진 옷가지들, 공간을 휘감는 습기와 음식 냄새들도 모두 뿌옇고 흐릿하고 둥글둥글한 정서들이다. 그것들은 날카롭지 않아서 베이지 않는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2mm 홀더펜과 두께가 아주 두꺼운 와트만지를 가지고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숲길을 거닐겠노라. 아직은 이 세상을 모르는 작은 어린아이를 하나 대동하여 내가 먼저 나무 그림을 하나 그려주고, 그 아이에게 자유롭게 숲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다음 종이 위에 거칠게 긁힌 흑연의 감촉을 찬미하리라.



직선이 없는 세상에 사는 쭈글한 아재의 망상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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