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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Nov 18. 2022

인문학과 정치인

  정치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인문학을 경유해야 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사람이 살아가는 수많은 양태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라면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야 한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가져봐야 하고, 내가 벌고 먹고 사는 일을 남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궁금해하기도 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시각에 어떻게 비추어질지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관계와 의미에 대해서 항상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나는 정치와 인문학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정치인들 중에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권력과 명예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표를 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계속 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막상 투표 시즌이 될 때에만 사람들 사이에 섞인다. 


"아참, 내가 사람의 표를 얻고 이 자리에 올라왔더랬지..."


과연 그들이 사람일까.


  권력과 명예에만 집착하는 정치인은 항상 적(敵, enemy)이라는 대상을 만든다. 왜냐하면 권력과 명예는 무언가 밟고 짓누르고 올라서야 얻어지는 생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항상 싸움(戰)이 존재하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무기를 갈고닦는다. 현대시대의 무기는 법조(法曹)라는 이름으로 활개 치며, 우리나라에서 그 무기는 검찰(檢察)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우리나라에서 검찰을 손에 쥔 자는 항상 쟁취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권력과 명예만을 좇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면, 사람의 가치는 빛을 잃는다. 권력과 명예만을 좇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면 권세와 돈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를 구실로 삼아 큰 것을 얻는다는 핑계로 작은 것들을 짓밟는다. 얼핏 보면 합리적인 계산일 수도 있지만, 이는 크기와 가치를 혼돈한 결과다. 큰 것이 곧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다고 나쁜 것이라는 믿음은 오산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전체주의 사상을 주입받은 결과가 100년이 넘도록 우리의 DNA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크고 강한 것이 좋다는 믿음. 즉, 계량적 합리주의가 인간적 합리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인문학은 자리를 잃는다. 나치의 집권기에 부흥하였던 독일의 반유대 미술과 예술은 민족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계량적 합리주의의 소산이었다. 천년이 지나도 살아남는 인문학과 50년이 지나서 소멸하는 인문학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정치인을 곁에 두어야 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정치인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들은 속이 뻔히 보이는 지루한 정치싸움에 휘말리기를 싫어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에 그들은 돈이 되지 않는, 권력과 명예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재판장에 가는 대신, 교실과 학당에 앉아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정치적 싸움에 큰 의미를 두기를 싫어하고, 그러한 싸움에 시간이 소모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나누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사람을 위하는 가치관들과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저마다의 상대적 가치들을 토론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고, 박완서 작가를 흠모하며,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는 정치인을 찾아라. 그러한 정치인이 비록 당신의 아파트값을 올려주지는 못해도, 역사적인 수많은 위인들이 행복하게 살아갔던 방법을 들려줄 수는 있을 것이다. 


  루터와 칼뱅의 의지를 이해하고, 법정 스님의 낮은 경구를 사모하며, 현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정치인을 찾아라. 그러한 정치인이 비록 당신의 월급을 올려주지는 못해도, 역사적인 수많은 판단의 시기에 어떠한 것들이 올바른 가치를 찾았고 살아남았는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소로우의 오두막을 사랑하며, 안도현 시인의 연탄을 그리워하고,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을 찾아라. 그러한 정치인이 비록 당신의 세금을 빼돌리게 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개인의 행복이 어떻게 상대적으로 다가오는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 


  정치인이라고 하면, 나서서 정치 하기 싫어하는 사람, 끊임없이 자기 생업과 철학과 사람과 인간과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과 계속 소통하고 싶어하고 은둔하고 싶어하고 조명받기 싫어하는 사람을 끄집어내어 일부러 돈을 주어가면서 정치를 시켜야 한다. 자기는 반장 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 동대표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 총무 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 자기 찾지 말라고 하는 사람을 끄집어 내어서 공적인 영역에 담궈놓고 많은 돈을 줘가면서 정치를 시켜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정치계에 담궈놓으면, 기존에 정치판에만 계속 머물러서 권력과 명예와 자리만 탐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고 무섭고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정치라는 것이 소모적이고,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으며, 타인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서지 않고 정치를 탐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기형적 DNA를 가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는 현재 그러한 정치인이 필요하다.


  남 부럽지 않은 최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보기도 하고 수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막상 본인의 의무에서 내려와서는 아무런 조명도, 댓가도, 허세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가장 낮은 바닥이라 할 수 있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9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손수 망치와 못을 들고 일하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귀화하여 공동체의 선을 구사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오래된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정치인들이 만약 우리 곁에 있다면...

재판, 소송, 고소, 비방, 조롱, 선동, 회유, 모함, 공격, 복수, 응징 같은 것에 목숨 거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만약,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고, 소설가를 사랑하고, 내 옆에 사는 이웃이 살아가는 것을 궁금해하며,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위대한 철학자를 존경하는 인문학 정치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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