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하고, 자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인생에 대한 집중과 존경의 자세가 부족하면, 타인의 삶이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결국 자신이 애매하면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정체성의 기준을 모르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불행의 씨앗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인간 각각의 고유하고 개성 있는 삶과 행복의 기준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고 그 이외의 것, 예를 들면 돈이나 명예, 허세, 지위 같은 것에 매몰되면 인생이 과도하게 바빠진다. 눈이 자기 자신으로 향하지 않고 항상 자기 밖을 바라보게 되므로, 단일한 내면의 한 곳을 바라보는 차분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대신, 항상 새롭게 변하고 끊임없이 흘러가고 줄어들고 불어나는 이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주하고 흥미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조건이다.
자기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은, 부족했던 자신, 실패했던 자신, 혹은 우울했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즉, 어제의 자신과 싸움을 벌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의 타겟은 명확하고 단일하다. 집중하기에 좋고 적이 그리 멀리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반면, 자신의 외부만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은, 돈 많은 타인, 운 좋은 타인, 잘생긴 타인, 인기 있는 타인, 혹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그럴듯한 타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즉,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자신과 싸움을 벌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의 타겟은 무수히 많고 항상 움직인다. 집중하기에 어렵고, 누가 적인지도 확정하기 어려우며, 적이 가까이에 있는지 멀리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결혼 이후 줄곧 단 한 번도, 나의 나이, 재산, 차의 종류, 아파트 가격, 집의 평수, 저축통장의 개수 같은 것을 나 스스로 확인한다거나, 타인에게 언급하거나 대화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살고 있다. 막상 일상에서 내 나이를 따져야 할 일이 전혀 생기지 않고, 내 재산과 통장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한다고 돈이 별안간 생기지도 않고, 내가 늙어 죽어서 두 눈을 감기로 작정하고 살고 있는 아파트 가격이 내 인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러한 정보들은 나에게 너무도 귀찮고 귀찮은 것들일 뿐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불로소득을 가능케해주는 부동산 투기나, 한탕 거머쥘 수 있게 해주는 도박 같은 뻘짓들 또한 나에게 아무런 유혹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내가 정말로 그러한 것들에 게으르고 어둡고 귀찮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병이라면 병이겠지만.
나의 나이를 알려주는 사람들은 막상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직장동료나 지인, 혹은 가끔 만나는 친척들이다. 그들은 나의 나이를 그렇게 궁금해하고 알려주고 싶어 한다. 태어난 년도를 알면 몇 년을 살았는지 자동적으로 알게 될 텐데, 이상하게 그들은 사람의 나이, 즉 수치화된 두 자릿수에 그렇게 목을 맨다. 너도 어느덧 40이 넘었구나, 어느덧 45가 되는구나 등등, 내가 그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너무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완벽하게 타인을 통해서, 내가 살아온 겨울이 몇 번 지나갔는지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가격을 알려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직장동료나 지인, 혹은 가끔 만나는 친척들이다. 그들은 나의 아파트 가격을 그렇게 궁금해하고 알려주고 싶어 한다. 인터넷으로 클릭만 몇 번 해보면 어느 아파트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 다 아는 세상인데, 이상하게 그들은 아파트의 가격, 즉 수치화된 억 단위의 그 돈의 액수에 그렇게 목을 맨다. 너희 집 이번에 얼마 올랐더라, 너희 집 이번에는 얼마 떨어졌더라 등등, 남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금액을 너무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관심을 가져준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완벽하게 타인을 통해서, 내가 사는 주거공간의 가치를 돈으로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현재 주식을 해야 하는지 코인을 사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 내 주위의 직장동료나 지인, 혹은 가끔 만나는 친척들이다. 그들은 내가 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맹렬하게 희망하고 부추긴다. 솔직히 투자나 재테크가 요원하다면 본인들이 스스로 하면 될 일인 텐데, 이상하게 그들은 타인의 투기, 타인의 번뇌, 타인의 희로애락, 타인의 인생과 결과에 그렇게 목을 맨다. 이번에 주식 올라가더라, 코인 망했다더라 등등, 막상 나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도박의 야릇함을 너무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권한다. 실제로 본인들은 돈 한 푼 벌지도 못하고 매번 손해만 보면서 그것을 굳이 나에게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완벽하게 타인을 통해서, 내가 주식을 정말로 귀찮아하고, 도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매번 재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한 것은, 나에게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나보다 좋은 차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성공한 사람들도 많은데, 혹시 어쩌면 그들은 나에게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서 그 '행복'을 빼앗아 가려는 것일까? 왜 그들은 타인의 삶에 그렇게 관심을 갖고 궁금해하는 것인지, 너무도 궁금해지는 요즘인 것이다.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움직여대는 물살에 맡기면 과연 재미있을까. 막상 자신은 가만히 있으려 하지만, 파도치는 물살 때문에 쉴세없이 떠밀려야하는 바다에 몸을 기대면 흥분이 되려나?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을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평평한 땅 위에 드러눕히고 싶다. 나는 재미를 원하지 않는다. 행운과 한탕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정신을 집착이라는 악마에게 빼앗기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나의 노력을 행운이라는 악마로부터 빼앗고 싶지도 않다. 나는 흔들림 없고 단단하고 고요해서, 내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떠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내가 누워있는지 서있는지 판별이 가능한 그러한 대지에 두 발을 붙이고 우직하고 느리고 성실하게 그냥 걷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해있어서, 내가 움직이면 그제서야 주변이 나의 시야로 스쳐지나면서 움직임이 확인이되는 그러한 대지 말이다.
나는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나의 생각과 행동과 성취를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행복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러한 생각이 병이라면 병이겠지만.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섬 - 케르켈렌 군도 中)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훌쩍 떠나고 싶은 40대 어느 날의 망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