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프타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back Nov 19. 2022

연필을 깎으며...

  가끔 나만의 템포와 여유를 찾기 위해서 연필을 깎는다. 연필을 깎는 느낌은 느린 속도와 비현실적인 효용, 멍 때림과 집중의 묘한 배합이다. 그중에서 단단한 섬유질을 잘라내는 폭신한 느낌과 서걱거리는 소리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연필을 깎을 때면 항상 국민학교 때가 생각난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샤프는 있었지만 선생님은 연필을 강요하셨다. 당시 연필을 반듯하게 깎을 수 있었던 햐이샤파가 대유행이었고, 가격은-내 기억이 맞다면 천원이었다. 국민학생에게는 사치품이었다.


  3학년 혹은 4학년 때인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친구와 단짝이 되었더랬다. 그 친구의 필통은 정말 지금 생각해봐도 가히 조각가 수준의 누군가가-기계가 아닌 손으로 직접 아주 반듯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유려한 비례로 깎아놓은 가지런한 연필로 아름다웠다. 그 연필은 그 친구의 얼굴이자 패션이었으며, 그 친구의 집안을 경외케 하는 일종의 후광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러워하였고, 감히 단 한 번도 연필을 빌려달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깎인 연필을 볼 수 없었노다고 고백한다.


  당시 운동회 때, 학교를 방문한 그 친구의 어머니를 단 한번 본 적이 있다. 지금 비교할 사항은 아니겠지만, 중년의 패티김이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을 때, 머리를 올백으로 묶어 올리고 긴치마를 두른 채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필통에 자리하고 있던 친구 녀석의 연필을 정성스럽게 깎아주었으리고 예상되었던 그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시절 내 의식 속에서 어떠한 보살핌의 기품이라는 것, 가족을 생각하는 손길의 보전과 같은 무형의 따스함을 전해주었으리라.


  얼마 후 그 친구는 자기의 어머니가 두 명이라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두 명의 어머니를 데리고 산다는 것이었다. 나는 감히 그 어머니가 그 친구의 친 어머니였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렵고 가난하게 살던 아이들이라면 의례 품고 지내야 했던 결핍과 혼돈의 시대 속에서, 마치 미사 때 보이는 정연한 촛불 같은 그 연필의 엄밀한 형상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라! 한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다듬은 그 연필! 그 사랑의 모양새라는 것은, 그것을 직접 사용하는 그 자녀와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친구들과 그 연필이 스치고 간 그 모든 종이와 그 연필이 담긴 필통과 책가방 그리고 그 연필이 지휘하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그 아련한 정서의 악단이 하나가 되어 마치 산 봉우리에 드러난 암석표면에 새겨진 이름모를 암각화처럼 오랜 시간동안 소중한 추억을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년시절을 어머니와 같이 살지 못했던 나는, 그 친구 녀석의 연필을 똑같이 따라서 깎는 연습을 계속하였지만 절대로 그처럼 만들지는 못하였다. 감히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어떠한 정성의 지극한 경지를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연필은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적성과 직업으로 연결되는 정신의 심연 그 막연한 구석에 자리하게 되었으리라.




  연필을 깎을 때에는 두꺼운 칼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연필의 나무는 주로 삼나무, 노송 같은 것이 쓰이는데, 섬유질이 매우 부드럽고 결이 강하기 때문에 얇으면서도 단단한 칼을 써서 베어내는 느낌을 찾는 것이 흥미의 포인트이다. 사실 깎는 것이라기보다는 베어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나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그러하지만, 서걱스러우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폭신폭신함을 갖춘 고체 천연 물질은 이 세상에 나무 밖에는 없다. 게다가 흑연이라는 탄소 덩어리가 그 중심에 심지를 갖고 들어가 있어서, 연필을 깎을 때에면 부드러움이라는 최초의 칼질 속에서 비로소 흑연이라는 단단함을 만나 본격적으로 연마의 작업, 정말 본질적인 깎기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직경 1cm가 채 안 되는 면적 내에서 이중적인 물성과 마찰력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샤프나 볼펜이 글을 조각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연필은 종이를 긁는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새기고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긁고 훑는 것이다. 눕히는 각도를 다양하게 하면 그 자그마한 흑연 심지에서 셀 수 없는 명암과 부피가 창조된다. 연필은 그야말로 신의 손가락이다.


  비가 오는 날은 연필  나무의 향이  배어 나온다. 그럴  연필을 깎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연필은  새것을 여러  깎아도 큰 부담이 없다. 가격도 저렴하거니와 중고로 팔 수도 없으므로 언젠가는 모두  것이기 때문이다. 쓰지 않는다 해도 장식용으로도 아름답다. 작고 아담한 산봉우리들을 보는  같은 느낌도 있다.



말랑말랑한 나무의 기품을 느껴보고 싶은 저녁에 끄적거림. 

끝.



매거진의 이전글 인문학과 정치인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