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의 뉴스공장 폐지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자세가 권유된다. 스스로 쌓아온 기량을 정공법으로 노출하여 돌진하는 방법과,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성을 뒤흔든 다음 감정의 허점을 파고들어 쓰러뜨리는 방법이다. 그 어느 것이든 추천할만하다. 올바른 심판이 경기를 감독한다는 바탕 하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법조계'라는 시스템이 심판의 역할을 한다. 그 심판의 족보는 일제 식민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100년이다.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 충성하고, 일본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한국 이름을 기꺼이 내버린 사람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던 시기였으니, 그 시기의 법조 시스템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히 거대한 종양이 제거되지 못한 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기생하며 살아 숨 쉰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과연 그 종양은 왜 제거되지 못했던 것일까.
언론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의 역할을 한다. 언론은 생업에 바쁜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고도 균등하게 접할 수 있도록 편향 없이, 공정하고 사실적인 기사를 기본으로 무장하여 일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언론이 단지 민간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돈을 많이 주는 집단을 위해서만 좋은 말을 하고,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집단에게는 거짓 기사와 악의적 보도와 편향된 정보를 사용하여 공격한다면 그것은 '언론'이라 칭할 수 없고, '민간정치공작단체'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일보(日報)라는 그럴싸한 명패를 달고 활동하는 유수의 국내 신문사들도 자신들에게 엄청난 광고비를 주고, 자신들의 조직이 이 나라에서 거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제기업이나 특정조직을 위해서만 맹렬하게 일할 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참된 언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언론의 질이 낮고 천박한 나라에서는 자발적 민주시민 단체라든지, 자발적 민주시민언론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김어준'을 필두로 하는 비공인 언론 미디어의 탄생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생성된 민주사회적 요청의 필연으로 기인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이 나라의 숙명적인 역사문제 - 일제식민시절부터 시작된 친일 민족반역세력과 법조계의 권력유착과 관련한 종양이 오래도록 썩어서 유발하는 한국형 정치부패의 냄새를 맡게 된다. 그 시기는 이명박 정권이 꼼수를 부려 국민들의 세금을 착복하는 것을 고발하는 것을 전후하여 말미암았다. '명쾌한 해답은 명석한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것에 기초하여 던진 한마디,
다스는 누구 것입니까?
이 한마디는, 방구석에서 개인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목소리를 키워온, 한 재야 방송인의 존재를 온 국가와 전 세계에 퍼뜨렸으며, 사람들은 허세와 기만으로 가득한 이 나라의 진지하고 근엄한 정치권의 형태를, 기발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낸 이 시사천재의 입담에 열광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열광에 힘입어, 국민들의 세금을 자신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했던 한 거대 도둑을 감방에 쳐 넣는 데 성공한다. 종양 가득한 이 나라의 비극적인 언론환경에 한 가닥 빛줄기가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뒤바뀐 나라의 운명은 21세기형 민주사회의 분위기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분위기 속에서 공식적인 언론의 역할을 맡은 김어준의 활약은 근 5년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희망과 웃음을 건네주었다. 그는 시사꾼이었지만, 정치뿐만이 아니라 스포츠를 좋아하였으며 문화예술에도 귀를 기울였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오로지 정치와 비정치의 갑을 관계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인문학과 역사와 예술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올라운드형 방송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새롭게 발굴하고 지원하고 재발견한 정치인, 언론인, 방송인, 문화예술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도와준다. 공정하지 못한 이유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공정한 방식으로 끄집어내어 그들의 능력을 되살린다. 자신의 기조와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 대한민국의 진보세력 이라고 하는 민주당 조차도 해결할 수 없었던 사건들을, 그는 혼자서 유쾌하고 해학스럽하게, 그리고 때로는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가 일그러진 민낯을 해부하여 사람들 앞에 풀어헤쳐 놓는다. 그의 자세는 수 많은 안티세력의 공격을 불러일으키지만, 적대적 관계에 있는 진영의 공격에 그는 언제나, 항상 유머와 코미디로 대처한다. 그는 상대방의 처절한 열등감과 기만과 분노의 돌팔매질에 대해서, 정공법이 아닌 - 일종의 돌려까기와 풍자를 이용하여 유연하고도 기발하게 받아넘기는 방법을 터득한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소고기'라는 것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에게 정치는 심각하고 허세 가득한 그들만의 삶 자체일지도 모르겠으나, 김어준에게 정치는 아름다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도구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방송에 등장하는 여러 좌우 정치인들의 다툼과 경박한 행위를 보면서도 우리 삶의 고귀한 부분 - 웃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감격하고자 하는 순간의 일면들에 대한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일상적 삶에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은 결국 그와 반대편에 있는 기득권과 수구세력들의 미움을 샀다. 자신의 권력이나 이익과 관계없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진실을 말하려 하고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그에게, 권력을 탐하고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고 서민들의 세금을 되도록 많이 자신들의 주머니로 모래 집어넣고자 하는 사람들과 집단은 상상할 수 없는 공격을 가한다. 그는 때로는 방어하기도 하고, 몸을 피하기도 하고, 공정하게 싸워서 맞서기도 하며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적들의 위세는 점점 거세어졌고, 실력으로 정면 승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정권'이라는 큰형님 찬스를 동원하여 김어준을 비롯한 민주진영에 칼을 들이대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종양의 잠식력과 그 썩은 고름의 유독한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수구세력은 김어준을 의자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한다. 2022년 12월의 끝자락에서 김어준은, 이제 공격을 받아 너덜너덜해진 공영 방송국의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편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편향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했다고 자부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올바른 말을 하고, 누가 제대로 듣는지 알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지만, 그 이전에 세상에 사실이라는 형태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도움이 되고 누구에게는 피해가 될지언정, 언론이라면 일단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우선이다. 처세는 그 다음의 일인 것이다. 그는 현재, 종양의 암세포를 부여잡고 기생하려는 집단의 복마전에서 잠시 발을 빼고 책상을 바꾼다. 사실 책상만 바뀔 뿐 목소리는 그대로이다. 자리도 허세와 형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의 방송은 인터넷과 유튜브라는 세계화의 물결을 올라타고 끊김 없이 계속된다.
민주주의가 나에게 돈과 명예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과 역사가 나의 아파트 값을 올려주지도 못하고, 월급을 올려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의 권력과 재물을 위해서 타인을 음해하고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쳐 넣는 일들이라는 것이 과연 그 행위의 당사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삶의 행복과 만족감을 부여하였는지. 그리하여 그것이 이 나라 민주의식의 발전과 역사의식의 가치상승을 위해서 단 1% 라도 일조한 면이 있었는지.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가족과 맛있는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사는 상상을 한다. 나의 작지만 올바른 행동이 나에게 보람을 주고, 내가 벌어서 모은 작은 돈이 나에게 충분한 편익을 제공할 때,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나 이전에 일어났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에게 앞으로 다가올 개인의 규율 - 칸트가 말했던 그 보편적 사회질서의 원리를 실현할 때, 나는 행복을 느끼고 정의를 느낀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이 세상의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정확한 진실을 접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 그 창구가 지금은 김어준일 뿐인 것이다. 우리에게 김어준이 필요 없어지게 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