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위험성과 평범한 누구라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반세기에 걸쳐 커다란 메시지를 전한 한나아렌트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책 제목은 [한나 아렌트의 생각], 지은이는 한국 한나아렌트학회장이기도 하며 한나 아렌트 다수의 작품을 국내 번역한 김선욱 숭실대 교수이다.
단정하고 쉽게 읽히는 제목, 군더더기 없는 책표지. 눈에 띄지 않는 책을 무심코 집어든 독자의 기대는, 핵심 주제로 정리된 목차에서부터, 한나 아렌트의 주요 사상을 알기 쉽도록 풀이한 지은이의 배려에 의해서 점차 확대된다.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때문이었지만, 사실 이 거장의 사유는 그 이전에 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작품에서부터 되짚어볼 수 있다. 나는 한나 아렌트의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김선욱 교수의 설명에 의해서, 전체주의 안에 제국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제국주의 안에서 히틀러와 나치 같은 집단 광기가 발현되었고 나치 안에 홀로코스트와 악의 평범성이 현실로 구현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평생을 정치평론과 정치철학의 카테고리를 넘나든 사상가였지만, 그의 가치관은 결국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코드로 귀결된다.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군중이나 집단으로 획일화되거나 매도되지 않고, 인간 개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김선욱 교수의 친절하고 명석한 정리에 의해서,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개념이 아이히만의 '평범한 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두 가지 주제 사이에 놓여있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징검다리는 무엇인지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집필한 모든 작품들과 그녀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여 정리-전개된다. 그녀가 초기에 완성하였던 대작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조건',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거쳐 '시민적 불복종' 등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사상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가 여러 각도에서 다루어지고, 다양한 예를 동반하여 설명된다. 정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기원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서, 언어(logos)가 정치와 관계맺는 과정,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이 구분되고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행위가 발현되는 양상, 집단의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도덕, 혁명, 법, 그리고 사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아렌트의 시간을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그의 사유의 발전과 방향을 순조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우리나라의 험난했던 민주화 과정이 뚜렷하게 언어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독재정권 시절을 경험했으면서도, 인식의 범위 안에서 과감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의 테두리가 명쾌하게 해석된다. 인간이 왜 집단과 군중이 아닌, 하나의 개성을 가진 인격체로 살아야 하는지, 왜 폭력과 이데올로기의 허상에 맞서야 하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지식을 과학적 방식으로 체계화해놓지만 실은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 참된 과학은 이론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이론을 수정해갈텐데,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이론에 집착해 사실의 토대를 사라지게 하는 특징이 있다.
남한이건 북한이건, 독재정권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폭력과 공권력으로 공포심을 일으킨 뒤 거짓말과 비현실적 이론을 사람들에게 주입한 채 그들만의 체제를 강화시킨다. 군사독재시절, 우리나라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면서도 실은 북한과 같은 독재정권의 전체주의를 유지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겉으로는 반공을 내세우고 헌법을 수호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죄 없는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집단과 전체로 시민을 매도하고 몰개성화하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주입한 것은 아니었는지,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으로 움직이는 법체계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해 놓고 실상은 권력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고문하고 탄압한 것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볼 일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이데올로기를 믿게 하기 위해 비밀경찰과 강제수용소 같은 장치를 만들어놓는다...... 심리적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국가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두려운 환경을 상시적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 있는 터전을 형성한다...... 우리는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의 보호를 받고, 국가도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운영된다. 당연히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법과 제도가 전체주의의 운동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부를 형식적으로 구성하고, 그와 동시에 법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정부를 따로 만들어 권력이 자의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나 집단이 아닌, 인간에 개인에 대한 고유가치가 드높아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다수 중의 한 명으로 단순하게 치부되는 것을 거부한다. 엄청난 숫자의 일부가 되어 획일화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름과 명예와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이다. 1인 미디어가 단순히 수백만의 구독자를 가진 미디어보다 더욱 가치 있는 콘텐츠를 양산하는 시대이다. 양적 수직관계가 아닌, 질적 수평관계를 구축해 가는 시대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탱크와 미사일의 위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억압과 폭력도 사라졌고, 독재와 이데올로기도 무너졌다. 전통적인 전체주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전체주의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열심히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과 가치를 갖고 싶어 하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전체주의적 힘을 구사하는 것들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시대, 오로지 돈으로만 모든 가치가 환원되고, 수치와 계량의 데이터가 새로운 권력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시대에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게 사로잡고 있고 공포심을 주고 가치를 주입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구 하나 우리에게 총칼을 들이대면서 겁을 주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는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왜 그렇게 외모와 학벌과 스펙에 목숨을 거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던 것, 인간개성의 잉여와 획일화에 대한 우려는 지금도 우리 앞에 드리워져 있다.
전체주의적 해결책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안긴에게 가치 있는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면, 언제나 다시 나타날 강한 유혹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은 당연하다. (전체주의의 기원 / 한나아렌트)
날이 갈수록 인문학의 가치와 인간의 복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어느 명석한 작가의 차분한 경고를 되새기며 리뷰를 마친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른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 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읽다 / 김영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