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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an 26. 2023

장면들 / 손석희 / 2021


  언론을 다시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저널리즘을 새롭게 되짚어볼 때가 되었다. 군사정권의 애완견 노릇을 하던 언론이 80년대 민주화의 물결로 인하여 다양한 형태로 분화, 생성되면서 정보에 목마른 일반 시민들의 눈과 귀를 흥분시켰지만, 이제 그들은 레거시 혹은 전통미디어라는 트로피를 받아 든 채 서서히 황혼의 뒷자락으로 사그라들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언론과 저널리즘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사의 가장 혼란스러운 변혁기 한복판에 서 있었던 장본인이, 이제 그 물결에서 물러나와 침착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저널리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2021년 11월에 출판된 그 책의 제목은 '장면들(The Scenes).' 저자는 이전 MBC 뉴스의 상징이었으며, 2013년 JTBC로 옮겨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보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언론인 '손석희'이다.


  이 책은, 손석희가 언론인으로 몸담고 있었던 시절 겪었던 수많은 사건과 역사를, 일종의 '장면들'이라는 개별적 이미지컷-혹은 기억의 조각들로 구분한 뒤 끄집어내어, 그와 관련한 이야기와 담론들을 저널리스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회고하고 해석한다. 마치 당시 뉴스의 중요한 보도사진들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우리에게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을 레거시(전통) 미디어에 있다가 디지털미디어 시대로 전환, 확장되어 가는 변환기 언론인이라 칭한다. 일종의 경계인(境界人)이자, 본래적 의미의 진보인(進步人)인 셈이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코드는 크게 '어젠더키핑(사안을 선택한 후 이끌고 하는 것)'과 '저널리즘이라는 것의 근본적 정의'이다.


  그는 전통적인 개념의 언론인이기를 고수한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보도를 함에 있어 '사실(fact)'을 우선시하며, 이해관계 속에서의 '공정'과 이데올로기에 있어서의 '균형'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격조와 품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로고스와 에토스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성과 논리도 특정한 품격 같은 윤리(에토스)가 없다면 언어의 전달력은 힘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뉴스의 본질은,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의 토론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그는 대책 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 내던져진 정통 언론인으로서, 고민하고 분투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던 여정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JTBC에서 활동한 기간 동안 자신이 추구하던 언론인의 가치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계획되고 구현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언론인으로서, 그 시대에 던져진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어젠다를 포착해 내어 이 사회에 물음을 던지고, 그 화두가 쉽게 잊히지 않도록 절묘하게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인 도구가 되기도 하고 상업적인 도구가 되기도 하는 언론의 생명을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도구의 하나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어차피 도구가 될 것이라면 그나마 좋은 도구가 되어, 이 사회의 변혁에 선한 기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 장사의 도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도구'였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사회변화에 선한 일조를 한다면 적어도 비아냥의 대상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언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역사의 일기 같은 것이다. 사관이 사초를 쓰고 자신의 관점을 첨언하듯, 역사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듯, 언론인 또한 사건의 진실을 기록하고 자신의 논점을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모든 주관의 바탕인 '사실'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론은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도 포함된다. 합리적 진보라는 사고체계 안에서 사실, 공정, 균형, 품위를 지니고 보도해야 한다.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고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뉴스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언론은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손석희는 기존의 언론지형을, 기득권이나 정권을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시민사회에 복무하고자 하는 감시견(watch dog) 언론, 미디어 자신들의 존재와 이익을 정권과의 공생 속에서 누리려는 경비견(gueard dog) 언론, 그리고 정권이나 권력집단에 충성하기만 하는 애완견(lapdog) 언론으로 구분하고, 자신이 주도하였던 JTBC의 보도관점을 '감시견 언론'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다는 것을 피력한다. 특히, 서로 협력자 관계였던 보수정권과 보수미디어가 분열을 일으키는 현상을, 박근혜 정권과 조선일보의 알력다툼의 실례로 드라마틱하게 해석함으로 해서, 언론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고 어떠한 이익을 노리는지에 대하여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 DNA를 해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언론지형은 이론적인 체계로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은 다양한 국가 및 지역의 각기 다른 문화, 역사, 전통, 관습, 언어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와 양상으로 나타나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때에 맞는 이익과 정서, 분노와 공감의 감정동학(感情動學)이 마치 측정하기 어려운 형상의 물결처럼 변화하기 때문이리라.


  언론의 전통적인 위상과 무게를 중시하는 냉정한 저자의 차분한 서술은, 여러 가지 사건과 장면들의 복기를 통해서 맥락을 갖는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을 때, 불과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정신을 들쑤셔놓았던 역사적 사건들의 한복판에 다시 서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영화의 일부분처럼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삼성노조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명박과 박근혜의 불법혐의, 세월호, 그리고 미투운동에 이르기까지, 저자인 손석희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 즉 어젠더를 어떻게 선택해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찰과, 언론이 어떠한 자세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성적이고도 균형 있는 시각으로 사건의 맥락을 서로 연결시키고 비유함으로써 독자에게 올바른 언론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올바른 토론문화가 필요한지, 전통적인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기자들이 왜 올바른 문지기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에 중요한 이슈와 어젠더가 항상 우리의 담론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기 위해서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예시와 해석을 통해서, 저자는 차근차근 주제에 접근해 간다.


  그는 균형을 추구하는 차가운 기자이다. 그는 올바른 저널리즘을 위해서 운동할 수는 있어도, 운동을 위해서 저널리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정한 객관과 주관의 경계선, 사실과 거짓의 경계선, 가해와 피해의 경계선,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선에서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려고 하는 언론인이다. 어느 순간 이러한 언론인이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서 불편해질 때, 사람들이 서로의 이익과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해 서로 편 가르기를 하고 팩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진영 논리에 빠져 언론을 아군과 적군으로 만들 때, 우리는 전쟁터에서 동떨어져서 저 멀리 초연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어느 고요한 타인의 시선을 아련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손석희가 되었든 아니면 누가 되었든, 이 용광로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현대사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존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정론의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겐 어려운 숙제이며, 세상이 양쪽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마침내 모든 진영으로부터 멀리, 혹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로지 언론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력만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돌 던지기나 침 뱉기도 불사하는, 저열하고 천박한 언론전성시대 - 일종의 기레기(기자+쓰레기)라 불리는 기자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읽는 이 또한 자신의 편향된 진영논리를 잠시 접어두고 성숙한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차가운 마음으로 차분하게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명저이다.



끝.


<참고자료>

알릴레오 북's 58회, 59회 - 멸종위기종의 생태보고서 / 장면들, 변상욱편

https://www.youtube.com/watch?v=BU1q5KsI5IU

https://www.youtube.com/watch?v=alfUtDMOq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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