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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05. 2023

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국민학교 때 아주 친했던 단짝과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하굣길을 나란히 오래도록 걸으면서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기억. 주변의 시끄러웠던 소음 때문에 오히려 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두 사람만의 세계는 오래도록 걷는다는 연속적 움직임 때문에 리듬을 찾았다. 모터를 돌리지 않으면 흘러나오지 않는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처럼, 우정과 교감이라는 감정은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성장하였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경동시장으로 약재를 사러 다녔던 나의 작은 보폭은 외할아버지의 걸음을 쫒기에 바빴다. 항상 애써 따라잡아야 했던 어른들의 걸음걸이. 그리하여 계속 숨이 차고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외할아버지의 바쁜 세계를 야속해하기도 하였건만, 어찌 보면 그렇게 서로 이가 잘 맞지 않는 속도로 걸어 다니면서도 의식적으로 나를 계속 데리고 다녀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마치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과 함께 언제든 걸어 다닐 수 있던 사람인양 그 걷기의 순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서 나는 유일하게 행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단짝 친구도 없고, 외할아버지도 없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고요한 수풀이나 들길을 걷고 있으면, 저벅거리면서 지면 낮게 깔리는 발울림 이외에,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았던 밤하늘 은하수라든지 혹은 내 어깨에 드리워진 여러 가지 정신적 짐과 멍에가 마치 나의 몸과 하나가 되어, 오로지 내가 딛는 땅과 발바닥의 마찰력만으로 온갖 무게를 버티며 이대로 끝없이 그냥 걸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내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내 육체의 고통을 고스란히 씹어먹으면서 음미하였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그는 여러 주일, 여러 달 동안 제 집을 떠나 자기버림과 스스로에게 자발적으로 부과한 시련을 통해서 속죄하고 어떤 장소의 위력에 접근함으로써 거듭나고자 한다. 이러한 순례는 신에 대한 항구적인 몸바침이며 육체를 통하여 드리는 기다긴 기도이다.


  걷는다는 행위는 그렇게 나의 인생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던 것 같다. 걷고 있으면 나의 몸은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생각은 그렇게 고요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단단하고 무미건조했던 대지는 이전과는 달리 리드미컬한 반응 같은 것으로 다가왔고, 공허하고 투명했던 대기는 이전과는 달리 침묵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내 몸과 머리가 그 한복판을 가로질러 헤집고 나가야만 길을 내어주는 밀도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걷는다는 행위는 아무것도 없는 지면 위에 홀연히 세워진 직립체가 허공을 서성대는 것이 아니라, 뿌리내릴 수 있는 바탕 위에 펼쳐진 이 세상의 온갖 움직임들과 소리들과 냄새, 온도, 바람, 색채, 습기, 압력 등을 마음대로 느끼면서 헤엄쳐 나갈 수 있는-일종의 바닷속 유영과도 같은 것이었다.



  걷는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은 정말로 온전하게 자신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육체적이고 지질학적인 행위이지만, 시선의 높이에서 펼쳐지는 세상의 관능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지극히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유희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건축물과 공원과 도로와 유적과 국가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도로만 파악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숙명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키 높이 이내로 제한된 시선으로, 그것도 제한된 보행속도로 느릿하게 걸어가면서, 마치 음식을 꼭꼭 씹어먹듯이 이동해야 하는 운명은,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찰나의 순간들과 주름진 시간의 단층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행운이기도 하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두 발로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한 감각, 사물의 떨림들이 되살아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지워져 있던 가치의 척도가 회복된다.


  늦여름이나 이른 봄의 어느 날 비 갠 직후 나가서 걷는 길은 그 어떠한 길이라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김훈 작가의 말처럼, 비는 이 세상의 냄새를 밖으로 우려내어 번지게 하는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비릿한 흙냄새는 땅의 생동감을 일깨워주고, 온갖 길가의 야생초나 수풀들은 그 고유의 풀냄새를 땅으로 털어내면서 걷는 이에게 청량한 느낌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만약 방수가 잘되는 신발이라든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서 달팽이들이나 지렁이들이 기를 쓰고 건너가려고 하는 그 촉촉한 길바닥을 온전하게 느끼면서 걷고 있노라면, 마치 이 세상이 수분이라는 유약을 뒤집어쓴 채 가시광선을 다소 덜 반사하여 기존의 색상보다 진하게 발색되는 선명함까지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니, 나처럼 걷기에 환장한 인간들은 비 갠 직후를 노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역마살을 사랑한다. 내가 걷기를 택한 것인지, 걷기가 나를 택한 것인지 잘 모른다. 이제 그 둘은 하나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육체와 정신 사이 어디 즈음 자리를 잡고서, 때가 되면 어김없이 어서 산책할 수 있는 신발을 찾아내라고 재촉 것이다. 이산 저산을 떠돌아다니는 들개들은 자신들이 방랑자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냥 자기 앞에 길이 있으니 걷는 것이다. 걷기는 걷기를 따로 요구하지 않는다. 걷기는 삶 자체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 쓴 '걷기예찬'은 그렇게 나의 역마살을 친절하게 어루만져주는 작품이다. 두 발을 대지 위에 딛고 서서 걸어가면서 이 세상을 가로지르는 모든 이들에게 넌지시 들려주고픈 한 편의 서사시이자 헌사인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이 책에 대한 별도의 구차한 설명은 필요치 않으며, 오로지 오감을 열고 자신의 발바닥에서 전달되는 중력의 저항감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눈높이에서 펼쳐치는 풍경과 소리들에 집중하면서 걷는 이들 누구에게나 추천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 같은 들개가 이 책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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