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붙이라는 녀석은 다른 동물에게 자신의 꼬리가 물렸을 경우, 스스로 꼬리를 절단하고 도망가는 능력이 있다. 신체의 일부를 희생하고 생명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그녀석 말고도 이 세상에는 그러한 동식물들이 여럿 존재한다.
인간도 비슷한 행위를 한다. 다리나 팔이 몹쓸 병에 걸려 치유가 어렵다면 잘라내야 한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질병도 마찬가지이다. 불필요하게 분노를 하게 된다거나, 이유없이 의심만 하는 경우, 자기도 모르게 계속 깊은 우울과 고민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들도 제거해버리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나을 것이다. 물론 도마뱀 꼬리자르듯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특이하게도 인간은 신체가 아닌 어떠한 정신적 감각마저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신에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감각은 과감하게 절단해버린다. 그것은 물리적 고통이 없고, 비용도 들지 않으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 듯 하다. 그리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금방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감각을 없애버리거나 변형시키는 현상은 타의에 의한 것과 자의에 의한 것 그리고 유전적인 것의 3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타의에 의한 것과 유전적인 현상은 일종의 불행한 가정사나 불가피한 DNA 발현 등의 환경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특정한 감각을 내다버리는 것은 인위성을 내포한다. 이 세상을 지각하는 감각이 인위적으로 교정된다면, 세상이라는 현상은 그에게 특별한 모양새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당은 언어교정을 통해서 독일군의 정서적 감각 일부를 제거한 사실이 있다. 독일군이 유대인을 '사살'하거나 '집단학살'하는 동안 나치당은 '특별취급'이나 '최종해결'같은 순화된 단어를 쓰도록 강요하였는데, 야만적 행위를 하더라도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감'이라든지 '연민'같은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감정에 손을 대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감각의 절단-자절(自切) 현상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이 시대가 점점 스마트해지고 온갖 수치와 빅데이터들이 축적되어가고 있는 사회라서 그런지 인간의 고유성 차제도 점점 측정이 용이하고 계량이 가능한 존재로 치부되거나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먀치 줄자처럼, 인간성이 수치화 된다면 자르기도 쉬워질테니까.
무더운 여름날 커피숍에 가서 형형색색 아름답게 보이는 과일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 했더랬다. 한여름이니 오죽 사람이 많겠느냐만, 그 가게에는 왠일인지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사람 한명만 일을 하고 있었고 주문도 너무 많이 밀린 듯 하였다. 꽤 오래 기다린 이후 받아든 아이스크림은 내가 주문한 것과는 메뉴 자체가 달랐고 형태는 누가 보더라도 불만을 가졌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더랬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후 그 분의 대응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라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다시 만들어주겠다거나 혹은 지금 이 메뉴를 제작하기 불가하다는 식의 반응이 있어야할텐데, 그분은 마치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을 일부러 정지시킨 로보트처럼 "지금 제가 만들수 있는 수준은 여기까지 입니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환불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 문장 속에 사과나 양해같은 주관적 감정의 단어는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언어문화가 변해버린 것이었는지 순간 당황하였다. 여차저차해서 서로 기분좋게 환불을 하고 나왔지만, 그 작은 문장 속에 숨어있는 이 시대의 정서라는 것이 몇 시간동안 나를 얼어붙게 하였다. 과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는 '일그러힌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이라든지, '불편함을 느끼는 상대방에 대한 염려' 혹은 '상황을 긍정적으려 변화시켜야겠다는 본능적 초조함'같은 감정을 미리 절단해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아르바이트생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치밀하지 못한 주인에게 대충대충 업무를 배웠을 수도 있고, 당일 같이 일하기로 했던 파트너가 나오지못해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일을 해야했을 수도 있다. 식자재가 수급이 안되었을 수도 있고, 때 마침 많은 사람이 몰려 허둥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닌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예는 종종 일어난다. 직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편의점에 가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도 맞닥뜨리고, 주로 식당 같은 곳이나 서비스판매를 하는 곳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지각을 해도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부끄러움 하나 없이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자기 다음시간의 알바생이 도착하지 않아도 자기 시간이 끝나면, 후에 일어나는 일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퇴근해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에서 물건을 하나 잘못 사도, 정해진 환불절차를 따르라는 기계적인 말만 반복하면 셀러는 법적으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익숙하지 않은 쿠폰을 사용해보려고 해도, 사용 할것인지 말것인지만 되묻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기 일쑤이다. 도대체 감정의 어떠한 부분들을 절단하면, 얼굴붉힘 하나 없는 기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기준으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자아를 분리시킨 유체이탈화법 - 자기 자신을 자아의 주관으로 능동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가 아닌, 어떠한 질서와 요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하나의 객관적 신체(身體), 즉 '자아객체화(自我客體化)'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이 행동하는 공간에서 하나의 기계 부속품처럼 자리를 잡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완전히 중지시킨채, 고용인이 제시하는 단어와 문장만 사용하는 것.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적 생각과 상황판단에 쏟을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사람과 사람으로 엮이는 관계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와 오로지 업무적 움직임과 언어만 사용하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은 '불필요한 책임'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사람은 주인과의 계약으로 이 자리에서 정해진 용역을 제공하면서 시간을 채우는 것이라는 아주 견고하고 단순한 논리에 지배당하는 듯 하다.
그러한 생각과 마인드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메뉴얼화된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고려되고, 다양한 상황에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 등이 정해진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인간의 다양성과 개성을 중요하시는 시대에 그러한 수치적, 정량적 메뉴얼이 잘 작동될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경우의 수를 많이 고려한다고 해도, 경우의 수는 정량화된 가상의 횟수일 뿐이다. 그러한 메뉴얼이 판을 치는 곳에서 잘못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 된다. 아이스크림은 본인이 배운대로 자신의 손이라는 기계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이 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원료의 문제이거나 제작법 자체의 문제, 혹은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손님은 그 가게의 주인에게 따질 수도 없다. 주인이 보기에 메뉴얼 자체는 완벽하며, 모든 수치는 정확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양자역학의 뒷편에 있는 문제, 그러니까 수치와 수치 사이에 존재하는 수 많은 무한 수, 이를테면 메뉴에 표시된 아이스크림의 형상과 그것을 예상하는 구매자의 두뇌 사이, 혹은 제조 메뉴얼과 그것을 숙지하는 아르바이트인의 손놀림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불특정 변수에 책임을 물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각이라고 부르고, 그러한 감각은 이 시대에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
효용과 경제성이 없으면 죄인이 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감각과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커피 한잔 사러온 손님에게 괜히 날씨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기분좋게 건네는 감정적 인사에서 얻는 이익이, 불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절단한채 업무의 효용성 만을 위해서 하는 최소한의 행위의 가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지성을 삭제한 단백질 덩어리가 돈을 들고 오는 단백질 덩어리를 상대한다는 개념. 어쩌면, 그러한 단백질 덩어리들이 며칠 후 보게 될 애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친구의 동생이나 형이 될 수도 있겠건만, 지금 이 시대는 사람의 얼굴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수 많은 군중 속에서도 우리는 손바닥위 스마트폰 안에 펼쳐진 가상의 얼굴들에만 잔뜩 집중한 채, 바로 옆에서 물리적으로 살아움직이는 인간을, 폰 속에서 돌아다니는 디지털 신호의 하나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볼 일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은 명확하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놓친 것이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양자(量子)가 아니라는 점이다. 업무 메뉴얼에 1과 2가 있다면, 현실에서는 1과 2 사이에 셀수도 없이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인간이 정량화할 수 없는 그 많은 경우들을 우리가 감정과 감각이라는 단어로 부를 때, 오로지 사람만이 그 영역에 접근할 수 있고 해석하고 행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가치는 바로 1과 2 사이 어딘가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맹자는 사단설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거론한다. 하지만, 불쌍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일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양보할 수 있는 마음도, 악행과 선행을 구부할 수 있는 마음도 모두 사람이 인위적으로 절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이 개입되어 불리하게 될 여지가 있다면, 그러한 감정을 과감하게 절단해버림으로써 원하는 곳까지 전진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듯 하다. 전두환은 측은지심이라는 감각을 일부러 제거하여 수많은 국민을 학살하고도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경지에 올라섰다. 박근혜는 수오지심이라는 감각을 일부러 제거하여 수백명의 학생들이 차가운 바다에 생매장되는 7시간동안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지에 올라섰다. 이명박은 사양지심이라는 감각을 일부러 제거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뇌물을 거절하지 못한채 탐욕을 미화하는 경지에 올라섰다. 자신의 처지에 맞도록 특정한 감각들을 절단해버리고,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만 가득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우리 각자의 시비지심이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모이고 섞여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일부러 절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피해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은 결국 나로부터 금전적 이득을 얻지도 못했고(환불을 해주었으므로), 존중의 마음을 얻지도 못했다. 또한 내가 타인에게 그 가게를 추천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가게의 주인으로부터 계약연장의 혜택을 입지도 못할 것이고, 그 가게 또한 평판이 나빠질 것이다. 즉, 아르바이트생의 그러한 발언은 당신 자신, 고객, 가게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는 한 예를 확대해석한 나의 우화적 독백이지만, 사람이 혼자서 무인도에서 혼자만 살아가게되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감성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끊지 말자. 끊지 말자.
우리에게 내재되어있는 선한 감정의 끈들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