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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an 14. 2023

불멸(不滅)한다면 과연 행복할까

  한 때 와레즈라는 소프트웨어 불법 공유 사이트가 난무한 시절이 있었다. softwarez 라는 말의 뒷부분을 잘라내어 속어로 통칭하던 말이다. 대학초년생 와레즈를 통해서 게임과 유틸, 영화 같은 것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저작권의 개념이 흐릿했던 시절이니 너나없이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많이 다운로드하여 썼던 시절이다. 


  나는 특히 PC 게임을 좋아했는데, 게임은 주로 와레즈사이트를 통해서 립버전(전체 용량 중에서 인트로나 기타 부가적인 자료를 제거하여 용량을 줄인 버전)으로 다운을 받는다. 립버전으로 받아도 플레이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렇게 하면, 일단 무료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2000년 초반 당시 PC 게임은 봇물 터지듯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역사상 명작으로 불리는 게임들이 당시에 많이 출시되었다. 


  '게임불감증'이라는 말은 아마 그때 처음 접했던 것 같다. 제대로 돈을 주고 구입한 게임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보고,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을 살핀다. 박스패키지 디자인도 중요하게 느껴지고, CD 프린팅도 살펴보게 된다. 제작자가 창조한 것들을 모두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돈을 주고 산 것의 가치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법 와레즈 사이트를 통해서 공짜로 받은 게임들은 제대로 플레이하지 않게 된다. 쉽게 받은 것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하게 구석구석 살필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 대여섯 개의 게임을 받게 되면, 몇 분 정도만 맛을 보고 그냥 삭제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내가 돈을 주고 산 게임도 어느 날 와레즈 사이트에 불법으로 버젓이 올라와있다. 비싼 돈을 내고 교환한 가치와 불법 무료 공유 사이에 '부조리함'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온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뒤흔든다. 돈을 내고 게임을 사는 사람이 바보가 되고, 무료로 게임을 하는 사람은 똑똑한 컴퓨터 고수로 불린다. 알베르 카뮈가 50년 전에 부조리를 인식화 했다면, 와레즈는 부조리를 형상화했다.


  나는 게임불감증에 걸렸고, 이후 수년간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손만 뻗으면 게임이 무료로 존재하고 있으니, 내가 게임을 돈을 주고 구매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현상은 오묘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나의 청춘을 붙잡았다. 과연 인생의 재미는 무엇인가? 나는 그때 무한하게 주어진 자유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최초로 느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 서두에서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삶이 유한하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과연 인생이 행복할까를 고민해 보았다. 게임불감증이건 행복불감증이건 모든 기쁨의 조건은 '유한한 환경'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도 100년만 살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년만년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게 된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나중에 언제든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의욕이 없어지고 가치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와레즈사이트에서 언제든 게임을 내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게임 자체도 받을 생각을 하기 귀찮아했던 것을 떠올린다. 인생도 마찬가지. 영원이 이어지는 삶이 있다는 생각이 가득하다면, 지금 하는 생각, 인식, 계획, 희망도 모두 나중에 언제든 실현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므로, 현재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현재는 죽은 것이고, 삶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이미 죽음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백억을 가진 연예인이나, 모든 명예와 성공을 누리는 사람도 자살한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조건에 인위적으로 유한한 제한을 걸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는 자기에게 지워진 짐과 한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인간이 30년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망상을 해본다. 만약 그것이 현실화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1/3로 줄어드는 것이고,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추구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움도 증오도 줄어들지 모른다. 미워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행복의 밀도도 얇아질 수 있다. 수많은 종류의 행복을 제한된 시간 내에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100년을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하루하루를 진지하고 밀도있게 살기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수명도 그러하고, 부도 그러하다. 지위와 권한과 명예와 성공도 모두 포함된다. 인간에게 들씌워지는 이 세상의 모든 조건이라는 것은, 수량이 늘어날수록, 무한할수록 퇴색한다. 미움과 분노라는 것도 범위가 넓어지면 두께는 얇아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한계와 조건을 살펴가면서 그 안에서 상대적인 행복을 찾아야 한다. 대가를 치른 것만이 그만큼의 가치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의미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이 아닌 언어와 정신으로 살아간다. 


  오늘 나에게 스스로 부여해야 하는 삶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자. 무한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시간이 있는 인생의 게임이 하루하루 긴장되고 걱정된다면 당신은 불감증에서 벗어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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