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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12. 2023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비운의 지리(地理) 조건


  사방이 바다로 막혀있다. 화산폭발과 지진, 쓰나미가 끊이질 않고 사람들을 몰살시킨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덧없고 부조리하고 기이한 것으로 의식화된다. 지형적으로 저주받은 섬에서 도저히 외부로 도망갈 곳도 없다. 1억 이상의 인구들이 그 좁은 섬나라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회전체의 정교하고 치밀한 질서와 규범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완벽하게 인정하는 합의가 필수적이다. 상명하복의 체계를 우상화하는 논리. 그 논리는 오로지 칼날과 무력에 의한 증명으로 탄탄하게 유지된다.



칼(刀)의 지배구조


  사무라이의 칼날은 막부시대를 풍미했다. 쇼군과 다이묘는 칼로 통치한다. 칼로 전쟁한다. 칼로 대화한다. 그들에게는 차분하게 앉아서 상대방의 너저분하고 따분한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 간결하고 치명적인 칼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정당하게 승부를 겨루어서 이기는 쪽을 존중해 주는 예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 승부에서 진 사람이 멸시당하고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강하고 우월하다고 느껴지는 존재를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따른다. 스스로 강해지고 싶어 하고 강건함을 미화한다. 반대로 그들은 나약하고 열등하다고 느껴지는 존재를 멸시하고 괴롭힌다. 그들 스스로 그러한 존재들이 같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싫어하며, 나약함이라는 것이 공동체에게 피해가 되는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자에 대한 이지메(집단괴롭힘)를 도구화한다. 이지메를 통해서 약자의 자생력을 시험한다. 끝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 존재는 죄악시되고 쫓겨난다. 결국 무력에 의한 승부는 이쪽과 저쪽,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가장 편리하고 공정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 박경리 / 일본산고 中 -

  그들에게는 칼이 언어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점점 짧아지고 압축된다. 구구절절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짧은 언어 속에 깊게 들어앉을 수 있는 뜻을 담는 습관이 생성된다. 문서는 이야기나 사연의 성격에 우선하여, 계약과 약속의 가치를 낙인 하는 증거로서 탁월한 도구가 된다. 그렇게 칼의 증명서가 된 문서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을 지배한다. 말 한마디를 잘못하거나, 약속을 배반하면 무엇이 뒤따르는지 증거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칼이 상징하는 잔혹함이라는 정서는 이미 지형학적 기괴성에서 명분을 획득한다. 사무라이의 칼은 이 모든 함의를 담은 채 그 나라 자체가 된다. 굴복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드시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들고 그것이 본인에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음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바로 그 칼의 도발은 잔혹하고, 명료하고, 강력하고, 고요하다.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도피적 개인


  백성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살 수 없다. 동일한 군주의 안정적인 지배를 받으려면 일체화된 복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군주는 군주대로 하나의 지배자, 백성은 백성대로 하나의 피지배자가 된다. 개개인의 개성이 드러날 수 없고, 군집화된 전체로서의 개인이 존재할 뿐이다. 주변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항상 관찰되고 서로 비슷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된다. 옆집에서 하는 행동을 동일하게 나도 해야 하고, 뒷집과 앞집에서 갖는 생각을 나도 동일하게 갖고 있어야 한다. 군주를 위하여, 군주가 지배하는 지역의 존속을 위하여 개개인들은 하나의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만약, 개인이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집안에 틀어박혀서 바닥을 파고 들어가 우물을 깊게 파야한다. 그러면 자기 자신만의 능력을 은밀하게 키울 수 있다. 은밀하게 집중된 노력은 완성도를 높인다. 완성된 노력은 결국 장인(匠人)이라는 독특한 부류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저기에 장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양을 위해서는 서로 간의 구분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집단적 개인으로 행동하고, 내면을 위해서는 자기만의 개성을 갈고닦는 외곬의 개인으로 행동하는 것. 그 누구도 자기만의 방에서 깊고 깊은 우물을 판 그 외곬들, 장인들의 기술을 따라갈 수 있는 자는 없다. 그 나라는 장인들의 나라가 된다.


거품이 맥주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꽃꽂이가 꽃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수집벽이 그 물건의 가치를 초과하는 것, 그런 일종의 전도야말로 일본 문화의 특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해진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숙련, 무가치한 초과, 장인은 그 모든 것의 거품 속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눈부신 잉여이다. - 김영하 / 여행자 도쿄 中 -



탈출구 속의 에로스와 그로테스크, 그리고 자결


  누르는 압력이 있으면 솟아오르려는 반발력이 생기듯, 몰개성화된 사람들의 욕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분출되어야만 했다. 규격화되고 통제된 일상의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던 그 특유의 문화는 정해진 범위, 정해진 제도, 정해진 규율 안에서 자유롭게 욕구를 배설하는 탈출구가 마련된다. 가부장 지배체계를 잡음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껏 성을 사고파는 것이 허용한다. 여성은 완전하게 성상품이 된다. 합법적 매춘의 등장이다. 호색과 에로스를 추구하는 문학이 급격히 발달한다. 탐미주의의 씨앗은 음산한 토양 속에서 배양된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토막 내던 사무라이의 칼, 시도 때도 없이 육체를 짓이겨 놓는 지진과 자연재해는 화가들의 미적 감각에 불을 지른다. 기괴한 모양의 창자와 검고 붉은 핏덩이가 상징화된다. 그들의 그림 속을 구불구불하게 기어 다니는 곡선들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선정적인 형상, 묽고 투명한 깊이를 허락하지 않는 진하고 강렬한 색채는 물이 섞이지 않은 고농도의 끈끈한 액체처럼 우키요에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그들의 색감은 백색조차 전혀 하얗지 않다.


  전체 속의 개인이라는 정서는, 온전한 고유성을 가진 개인이 아닌 그저 부속품의 하나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여러 가지 형상의 다양한 배설을 통하여 때와 장소에 맞는 높낮이로 조절되고 향유되어야 하지만 사무라이 문화는 언제나 짧은 단절, 즉 베어짐(斬)을 요구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감수하게 되는 어떠한 실수, 고통, 후회, 미련 같은 감정들은 애매함을 싫어하고 명확한 관계를 요구하는 섬나라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스트레스의 탈출이라는 것은 오로지 칼로 베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불미스러운 씨앗을 남기지 않고, 미련의 감정을 말살해 버리는 것. 그것은 바로 자결, 즉 죽음이었다. 그들의 정서와 의식구조의 탈출구 끝에는 용서, 화해, 도전, 성장, 번복, 참회, 신앙, 투정, 극복 같은 중간단계의 감정적 완급장치 대신 자살이라는 죽음의 사자가 기다리고 있다. 니힐과 허무의 뿌리 깊은 분위기는 죽음 밖에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섬을 벗어나고 싶었던 군국주의 졸부(猝富)


  서양세력의 진출을 끝내 막지 못했던 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개화를 선택한다. 그들의 칼은 총과 군대가 되었고, 그들의 정신은 제국주의를 만들어낸다. 문명에 눈뜨지 못했던 시골 촌뜨기가 군국주의 졸부가 되는 순간이다. 승부의 피가 흐르는 민족. 인간 개개인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군주와 집단을 위해서 개별성을 해체시키는 민족. 천황폐하라는 상징을 위해서 서슴없이 자결을 선택하는 민족. 그 섬나라는 그 지긋지긋한 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대륙으로 진출하여 세계를 집어삼키고 싶어 했다. 일체화되어 고분고분한 백성들을 맘대로 지휘하며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조건, 개화의 혜택을 바탕으로 하여 군대를 만들어 국가적 비호를 받으며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있었던 조건, 명문화된 증거로서의 문서기술을 고도로 발달시켜 음흉하고 영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미처 개화하지 못한 나라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조건, 잔혹함에 대한 거부감과 양심이라는 인간고유의 정서를 칼의 문화를 통해서 면역시키고 무마할 수 있었던 조건, 인권과 역사의 진실이라는 가치를 약육강식적 지배구조의 편의에 따라서 왜곡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그 본성적 정서의 조건. 이 모든 것은 지형학적 우연과 인간본능의 욕심이 만들어낸 기괴한 합작품이었다. 에너지는 돌연변이처럼 폭발한다.


한국의 반일에는 항상 역사를 동반하며 그것을 증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유의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일본인은 소위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는 역사로서 현재와 무연한 것으로, 방편으로 씌여지는 정신적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만세일계를 주장해 온 천황의 역사, 다시 말하자면 역사로서의 천황을 의미하고 있으며 같은 일본인의 역사성이야말로 근린제국 제민족에게는 지극히 수상쩍게 보일 것이다. -가와무라 미나토 / 반일과 향수의 틈새(박경리 / 일본산고 中)-



두 개의 가면이 필요한 제국주의 문화


   고립된 섬나라의 사람들을 개개인으로 만난다면 예의 바르고 상냥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분고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있다. 하지만, 공공과 집단의 성격으로 만난다면 보이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작동하는 커다란 조직적 힘의 지배를 느끼게 된다. 거대조직의 공룡 앞에서 무기력하게 입을 다물고 물러나는 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발달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없는 진귀한 광경이다. 그들은 커다란 톱니바퀴의 친절한 일원이 되어 열심히 일하면서도, 개인의 사적인 일상을 간섭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간섭 또한 받지 않으려는 의식은 극도의 개인주의를 양산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절대 간섭하지 않고,  아는 내용이 아니라면 나서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은 쇼군을 위시한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간섭도 없이 권력을 위임했다.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들 또한 자신들과 조직을 위해서 세금을 내는 농민들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현대 일본에 와서도 정치를 하는 사람은 개개인들이 위임한 권력을 알아서 행사하면 되는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거의 대부분 정치에 관심이 없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잘해야 하는 것이고, 개인들은 개인생활을 알아서 잘하면 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싸워준 전쟁범죄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넋을 기리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된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지배와 피지배의 천년 명분이 날아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침략과 정복이라는 것은 인류사적 죄악의 문제가   없다. 단순히, 자신들을 보호해 준 윗사람들의 분투였다는 의미뿐이기 때문이다. 거대 조직을 위해서 개인을 몰살시키면서도 사생활을 위해서는 개인을 다시 회복시키는 행위는 단순히 충성심이라든지 이타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없는 '집단복종' '개인몰두'라는 이율배반의 정서. 이것이 진정한 일본의 본모습이다.



전체주의의 향수(鄕愁)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의 참극은 인류사에 커다란 깨달음을 던져준다. 하지만, 어떠한 거대집단이 사람들의 개별적 희생을 요구하면서 조직의 목적과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은 선악의 구별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권력을 이용하여 특정 집단의 목적과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전체주의라는 지배방식은 영원한 유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이미 그 비인간적 패륜성으로 인하여 인류문명의 진보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인간 개개인을 집단이나 거대조직이 아닌, 각각의 개별성 있는 고유의 인격으로 그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인류 역사에 주어진 사명이다. 인간 고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유럽 선진국들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정 반대쪽, 즉 민주주의의 정점에 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와 의식을 존중하고 가치화하는 방향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꿈꾼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선진국들은 국력이라는 것이, 국가적 집중으로 이룩한 경제력보다도 인권에 기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은 아직까지도 쇼와시대의 향수를 부여잡고 제국주의의 망령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것이 사실이다.



  일본을 위시한 세계의 특정 일부 국가들이 아직도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일부 폐쇄적 권력 집단들도 그러한 망령을 뒤집어쓰려고 발버둥 친다. 그 어떠한 집단이든지 공권력을 방패로 삼아 전체주의의 향수에 취하여 마음껏 검(刀)을 들고 활극을 펼치려 한다면, 깨어있는 사람들의 조직된 힘과 지속적 관심으로 막아야 한다. 위정자들은 위정자대로 시민들은 시민대로 따로따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그 어느 곳에서라도, 통제받지 않고 폐쇄된 집단에서라면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은 항상 또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마치 조금이라도 습기가 들어차면 여기저기 번지는 곰팡이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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