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씨앗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극우 선동자들이라든지 폐쇄적 독점권력집단의 특정인을 향한 맹목적 증오와 분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러한 열광의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것은 진정 응축과 에너지이다. 타인을 비방하는 언변 속 그 집요한 눈빛.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언어를 재단하는 냉철함.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줄곧 자신을 헤아리는 신중함. 조금이라도 동조자를 얻으려고 감정을 끌어올리려는 그 진중함. 차곡차곡 정돈되어 금세라도 폭발할 폭약으로 차분히 정리된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어딘가에서 혹시 안 좋은 스트레스라도 담아온 것일까. 혹여 모를 이름없는 분노를 얻어가지고 와서, 그것을 배설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정치인들의 언변이야 뭐 그들의 일상생활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을. 마치 나의 일처럼 인식하며, 앞뒤 사정 봐주지 않고 불나방처럼 돌진한다. 하긴, 태극기 집회 같은 곳에서도 왜 피를 흘리면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아마 가장 중요한 인자는, 자신들의 생각과 결이 달라서이겠지. 내 말이 맞는데, 왜 너희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하냐는 것 아닐까. 그런데 위험한 것은 그 속에 정의와 상식이 없다는 것. 오로지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부정한다. 그것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다. 나와 다른 것은 안된다. 나와 다른 것은 나에 대한 배신. 나와 다른 것은 나에 대한 모욕. 나와 다른 것은 나에 대한 부정.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게되는 그 원인과 과정을 찾지 않고 오로지 다름의 결과만을 놓고 따진다. 차이의 부정. 틈새의 불편함.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열등감의 탄생
그러나, 정작 더욱 중요한 인자는 바로 증오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꼴 보기가 싫은 것이다. 그것은 이지메와도 다르다. 이지메는 나약함이라는 틈새를 파고들어 일반적인 범주의 보편성과 불리한 열외성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일종의 동물본능적 행태이지만, 증오는 상대가 나약하건 강성하건 상관없이 증오를 양산한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몸 담고 있는 범주와 그 세계의 룰을 지키지 않으려는 자세를 불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대를 보고 있으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가치관이 상대적으로 그들과는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상대방의 논리가 너무 완벽할 경우 자신은 상대적으로 그르거나 열등한 것이 된다는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증오의 본질은, 상대방 혹은 다른 진영에 의해서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열등감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잉태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일베나 극우광신자들의 행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열등감 밖에는 남지 않는다. 자신의 논지와 가치관이 공론화된 영역에서 그릇된 것으로 검증될 때, 그들은 인지부조화라는 틈새의 순간에 가로놓이게 된다. 일단 자신들의 사상을 서둘러 정의로운 쪽으로 되돌려 세우거나, 아니면 검증된 공론을 타도해야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상의 상식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서둘러 좁히려 하는 것. 그것을 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그 행위의 연료가 바로 열등감이라는 소리이다.
인지부조화의 촉발
유대인 제사장들이 빌라도 앞에서 요구한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완전무결한 메시아 상(像)과 너저분하고 누추한 예수라는 인간의 상(像) 사이의 인식의 격차를 좁혀달라는 것이었다. 그 격차를 좁히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들의 메시아가 별 볼 일 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것이거나 혹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확인하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 것이다! 인지부조화의 서사는 이렇게 2천 년 전에 만들어진다.
증오는 이렇게 두 가지 세계에 가로놓은 틈새를 어떻게든 없애려는 인류의 오래된 노력이다. 그러므로 증오는 옳고 그름이 없으며 위아래 상하좌우가 없다. 오로지 틈새만 있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고개를 돌린 것은, 증오의 한 형태였다. 증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유대인들이 매일매일 수천 명씩 생매장을 당하거나 화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는다. 증오의 인식이 공론화되어 세상에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는 서로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음식을 나누는 일상을 받아들였지만, 히틀러가 유대인말살의 형태를 세상에 드러내자 사람들은 유대인혐오에 노골적으로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전란과 격변으로 피폐해진 국가에서 자신들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어떻게 배설해야할지 막연하게 궁싯거리고 있었던 유럽인들은, 검소하게 살아가는 자신들보다 나름대로 공동체를 유지해가면서 고리대금과 그들만의 전통을 지켜가면서 잘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꼴보기가 싫어진다. 그런데 마침내 히틀러라는 방아쇠가 당겨졌다. 아! 이제 맘놓고 증오할 대상이 도마 위에 올려지는 순간이다!
다수동조편향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요소는 동조편향이다. 그것은 익명성에 우선한다. 대중과 다수가 결집되어 있다면 목소리를 내는 것에 공포심이 사라진다. 너도 나도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게 되면, 나의 손가락도 손쉽게 그 사람을 향할 수 있다. 공포는 공포심이 사라지는 곳에서 생성된다.
열등감, 증오, 인지부조화, 동조편향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 사람들은 이성을 잃는다. 옆에 돌이 있으면 그것을 집어들 것이고, 칼이 있으면 그것을 집어들 것이다. 옆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야성의 감정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방치된 가정에서 약육강식의 룰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밖에 없었던 떠밀림.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받지 못해 어긋나버린 왠지모를 결핍.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나와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타인들의 공감을 받으면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름 모를 의문감. 나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이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데에서 생기는 고립감. 인생을 사는 동안 쌓여왔던 이름 모를 불안감들이 한데 뭉쳐서 자신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줄 사람들을 찾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가치관이 맞다고 되새김질 할 수 있는 단체를 찾아나선다. 그 때 부터는 옳고 그름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앞뒤 맥락과 상하구분도 없다. 내가 이쪽 진영에 있으니, 저쪽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적이 된다. 옳거니! 이제 그들은 타겟을 찾은 것이다. 범주는 내편과 상대방이라는 이분법으로 뚜렷해진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 내편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으로 바뀐다. 그 사람의 명성, 학식, 도덕, 혹은 인맥이나 혈연같은 것도 중요해지지 않는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영역에 같이 서있냐 아니냐가 중요해질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본질과 상관없이 돌팔매가 시작된다. 살일 짓이기고 뼈를 부러뜨려 눈물과 고통소리를 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여지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속에 쌓여왔던 울분이, 나와는 다른 진영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는 기쁨으로 한번에 해소된다. 그들은 손에 묻은 피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일생에 처음으로 승리를 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증오는 열역학 제1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잔돈을 계산하게 된다. 잔돈을 세는 것은 까다롭다. 항상 수지가 맞지 않고 손해 보고 이익 보는 이가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손해 보는 이를 항상 이용하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볼 때 타인을 맹목적으로 증오하거나 괴롭히려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내부의 일부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다수이다. 그러니, 그들의 세계는 닫힌 세계인 것이다. 닫혀 있으니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이다.
눈과 귀
상대방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상대방의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자들을 멀리해야한다. 오로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풍문에 의해서, 그것도 자신이 단 한번도 살펴본 적이 없는 타인을 돌팔매질하고 공격하는 자들을 멀리해야한다. 평생 한번 만나서 이야를 나누어 본 적도 없고, 단 한번도 그 사람의 글을 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돌팔매의 진흙탕을 멀리해야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분노와 싸울 뿐이며, 자신의 증오와 대결할 뿐이다.
그렇게도 죽이고 싶은가
분노와 증오의 이유만으로 자신을 헤치려는 군중에게 드레퓌스는 이렇게 토로한다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 가슴 속의 심장은 깨끗하며 아무런 오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내가 죄가 있다고 믿는다면 자, 내 몸뚱이를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내 몸을 아무런 후회없이 당신들에게 바치겠소"
피를 쫓지 말라
유대인 제사장들은 끝내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시오. 그리고 그 피를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
커다란 짐짝처럼 들씌워진 열등감을 가진 단체에 의해서 맹목적 증오와 폭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가만히 지켜보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오랫동안 가만히 들어보라.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직접 쓴 글을 오랫동안 차근차근 읽어보라. 그리고 그 처지를 오랫동안 가만히 생각하라. 무언가를 알고 싶다면, 오랫동안 냉정하게 관찰해보라. 그 무엇이든 호들갑스럽지 않은 침묵의 오랜 기간을 겸비하라.
그것이 결국 선과 인내가 악과 증오를 이기는 과정이다.
날벼락처럼 모든 것을 앗겼으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
내게 무엇이 남았나를 생각해 보았다
명예 타이틀 지위는 모두 잃었으나
나 자신은 앗길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것임을
그 진리를 아주 늦게 아주 힘들게
그러나 경외롭게 깨달았다
나는 나이며 나의 고유함
그동안 나를 구성했던
인성 자존감 지성 판단 믿음 등은
오직 나의 것이며 아직 건재하다
이제 하나씩 건져 올려 향후 내 삶의
재료로 만들어 갈 꿈에 부푼다
그래 나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거야
포기하지 말고 가 보는 거야 이 길 끝까지
결국 이 생에서도 나 그리고 저 생에서도 나
고유하며 결코 소멸되지 않는 존재는 나이니까
(본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