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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14. 2023

결혼, 여름 / 알베르 카뮈 / 1939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동 중에서 극진한 격조와 아름다움을 지닌 글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본능이라는 것은, 매 순간 피부를 스치며 엄습해 왔다가 사라지는 감각의 무한성과, 돌보아주는 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물질의 무위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처하여 그러한 세계에 허리를 숙이고 스며들어간 카뮈의 육감적인 글은 어느덧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의 응시를 요구하는 니체의 눈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카뮈의 글은 종이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래사장, 바위, 무더운 지방 골목에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의 석조벽, 번들거리는 바닷물을 뒤집어쓴 어깨, 심지어는 하얗게 내리쬐다 못해 검게 타버린 태양빛의 무심함 속에 명징하게 새겨진다. 그는 대지위에 내던져진 채 살아가는 육신의 운명을 노래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하여 그의 언어는 '절망'이라는 근육 위에 새겨진 '희망'이라는 문신으로 꿈틀거린다. 마치 하늘을 향해 던져진 지혜의 돌이 계속 대지 위로 속절없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짜라투스트라의 우수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제가 먹여 키우는 인간에게 저의 찬란함과 남루함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곳은 얼마나 기이한 고장인가! 이곳에 사는 감수성 예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난 풍부한 관능적인 감각이 지극한 헐벗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외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치고 그 속에 그 나름의 쓰디쓴 맛을 담고 있지 않은 진실은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있을 때만큼 이 고장의 얼굴을 사랑하게 되는 때는 없다 한들 놀라워할 까닭이야 있겠는가?


나는 다소 반대편에 있을 법한, 표독한 꽃뱀의 잔혹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서정주의 시선을 떠올려 봤더랬다. 동양의 탐미가 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관능에 집중된 것이라고 한다면, 카뮈의 찬양하고 싶어 했던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오히려 하늘 위에서 사정없이 쏟아붓는 태양빛의 천연덕스러움과 그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 무심한 폭력의 태연함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다. 거침없이 뿔을 휘둘러대는 야생들소의 난폭한 성질을 비웃어가며 그 발길에 차이고 죽어가면서도 우스꽝스럽게 그 주변에서 계속 죽음의 도박에 달려드는 어느 이름 모를 부족의 놀이가 떠오르는 것은 비단,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고통을 동반한 즐거움이 가져다주는 쾌락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던져진 생의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상관없이 마주쳐야 할 이 따분하고 아름다운 대지의 생기에 몸을 맡기는 그저 자연스럽고 까닭없는 투신인 것이다. 


카뮈는 인간과 자연의 이 성스러운 결혼을 통해서, 돌연하고 허망한 실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가 일관되도록 언급해 온 부조리와 태양, 그리고 그 어떠한 권력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는 각자의 무의미한 존재가 서로 어떻게 끌어당기고 다시 내던지는지 찬양한다. 그의 절망은 희망에서 나오고 그의 기쁨은 고통 속에서 자란다. 예상하지 못하는 하루의 시작을 위해, 녹아내린 몸을 잔인하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 이른 아침잠과 같이, 그가 찬양하는 모든 절망 속에는 그토록 찬란한 빛이 가득하다.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동시에 삶의 부조리도 증대시키게 마련이다. 알제의 여름 속에서, 고통보다도 더 비극적인 것이 단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복한 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민자들의 고향, 작렬하는 태양, 찬란한 바다,불모의 땅으로 상징되는 알제 속 카뮈의 어린 시절.


그는 왜 절망을 노래하는가. 그는 왜 폐허 속에서 고귀함을 말하는가. 그는 왜 생명체들과 동떨어진 광물과 바다,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한 무더위의 절멸 속에서 태어남을 이야기하는가. 이율배반적인 그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지만, 그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 가련한 핏줄과 철없이 죽음으로 달려드는 무의미한 생을 노련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내던져진 삶과 들씌워진 생에 대한 순진무구한 탐닉. 카뮈는 시지프스가, 신의 노여움을 산 그 괘씸한 대지와 어떻게 결혼하는지는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토록 가련한 반항의 모습이라는 것이 일종의 발칙한 생의 원동력이 되어, 거대하고도 무심하며 동시에 잔혹하기도 한 지중해의 바닷바람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감각과 의식을 양분하려 했던 나의 고집이 누그러진다. 그의 글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불가한 실존의 무위성을 우리 모두가 각자 순진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측량할 수 없는 대자연의 일방적 은총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의 빛 같은 것이라서, 그 무엇을 구분하고 나눌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행복과 기쁨 속에 함께 딸려오는 모든 고통과 절망의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신을 손아귀를 가출한 탕아이지만, 또한 어찌 보면 신의 손바닥을 즐길 줄 아는 양자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어두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성취하는 과업의 한가운데에는 오늘 들과 산들에 걸쳐 절규하는 그것과 똑같은 어떤 굴복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한 글자, 한 문장, 제각각 눈을 감고 음미하며 읽고 또 읽어보아도, 마치 날마다 새로운 형상으로 들이치는 파도처럼 카뮈의 글에서 휴식과 휴가를 찾는다. 하루종일 위아래로 요동쳤던 마음을 가지런한 백사장 위에 천천히 들어 눕히고 고요하게 달려드는 폐허와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하나씩 하나씩 나의 피부 위로 올라오는 언어의 격조와 온 세상을 비유로 물들이는 경건한 문장에 의식을 완전히 열어놓는다. 이토록 가슴 설레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찬가를 어찌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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