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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05. 2023

방랑기 / 하야시 후미코 / 1930

  온전하게 몸뚱이 하나로  날고기 같은 글이다. 볼품없는 외모, 전무한 집안배경, 완벽한 가난을 등에 짊어지고 처절한 인생을 버텨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기적 같은 일기.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서 끈질길 생명을 부여잡은 ,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기어코 살아냄으로써 인생의 깊은 의미를 증명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의 최하층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몽유병 같은 독백은,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모진 현실의 대한 증거이자 해학이다. 그녀는 끝내, 자신을 평생 괴롭혀온 가난이라는 굴레를 기꺼이 뒤집어씀으로써, 인간의 삶이 고통 속에서 승화하고 매 순간 역경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의 일기는 그 시절의 역사이고 기록이며, 고발이자 다짐이다. 극한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피식 터져 나오는 그녀의 웃음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자조(自嘲)와 결의(決意)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박완서 선생과 박경리 선생이 글로 고발한, 그 질퍽한 애환의 시기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개화의 물결 속에서 침략과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사람들의 고단하고 우울한 일상이 인간 본성의 야만성을 부추기던 그 시대. 하지만 처절한 하루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자신을 소모한 여성이 끝내, 생살 같은 글로써 그 시대를 증명해 내었다. 과연 7전 8기의 상징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장사도 안되고 글도 안 써지면 유곽에서 몸을 팔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녀의 글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을 때 터져 나오는 극한을 뛰어넘어, 왠지 그 뒤편에 서려있을 법한 고통의 근원적 냉소와 차분한 모멸에 대한 찬양이리라. 마치 코미디처럼 다가오는 가난의 무자비한 물결을 매 순간 타고 넘어가면서 생각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는 질긴 생명의 허탈함이었을까. 그녀는 그렇게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삶의 밑바닥을 누비며 그나마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시시콜콜하고 보잘것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일상의 작은 축복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듯 천진난만한 노래를 읊는다.


피를 토하고 괴로워하며 죽더라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대지입니다. 진열장 안에 따끈한 빵이 있어도 내가 모르는 세상은 정말 피아노처럼 경쾌하고 아름답군요. 그때 처음으로 하느님 제기랄 하고 소리치고 싶어 집니다


  일본문학의 풍토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는 매우 과감한 작품이다. 도발적이고 격정적이다. 쉼표에서 한번 안으로 되삼키고 정제된 어조를 뱉어내는 그네들의 정서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 이것은 온전하게 삶에 대한 육신적 체험과 경험에서 나오는 맨발자국 같은 것이다. 근래 와서는 페미니즘문학의 효시 같은 작품으로 남았지만, 당시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의 폐쇄성을 감안할 때, 대단히 위험한 작품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암울했던 대공황의 시기에 여성들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었으리라.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방랑에 비유한 도발적인 서두에서, 오랫동안 차별받고 고립되어 살아온 여성들에게 그녀는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
후지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
너를 비웃는 여자가 여기 있다


  여자로서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한계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그것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일본사회에 고착화된 풍토와 관습에 반기를 든 최초의 전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자신의 씨앗 속에 문학에 대한 심지를 고이 간직한 채 육체의 노동을 발판 삼아 은밀하게 골방에서 눈물로 찍어낸 일기는 마침내 그 시대를 공유한 수많은 하야시 후미코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그녀와 독자들에게 위안을 선사했다.


  그녀를 스쳐간 남자들의 폭력과 방종, 커다란 인생의 짐이 되어버린 부모의 굴레,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하루를 고스란히 감내하는 일회성의 희망, 그리고 그 안에서 결고 잃어버리지 않았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이 처절한 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엄중한 격정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하루를 살고 죽을 것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그 육신의 고귀함을 글로써 증명해내고야 마는 이 작은 거인의 노고 앞에 나는 일기가 가진 힘을 다시금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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