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기준의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살펴보면, 인구절벽의 경고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초반에는 한 학급에 50명이었으나, 지금 고등학교 교실에는 25명이 있다. 앞으로 50년 후에는 13명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는 20대의 남녀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 30대가 되어서도 거의 결혼하지 않는다. 30대 후반이 되거나 40이 되어야 아주 낮은 수치로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낳아봤자 한 명. 많으면 두 명이다. 2024년 1월 현재 20대에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는 가정이 있다면, 곧바로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이다.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꺼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으로 꼽는 것이 집 장만의 어려움이라고 한다. 그다음으로 취업불안도 있을 테고 자녀양육의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통계는 사실의 기록이니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러하다면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젊은이들이 집장만하는 것만이 어렵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 반대로, 집이 모두 하나씩 있다면 결혼이 가능한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들씌워져 있다. 교육을 잘못받았다는 소리이다. 물론 젊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 부모세대의 잘못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꺼리게 된 이유는 그 부모세대의 잘못 때문이다.
굴레에서 벗어나기
내가 어릴 때에도, 혹은 우리 부모들이 결혼하던 시절에도 집 장만은 어려웠다.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만 집 장만이 어려운 것처럼 너도나도 떠들고 있으나, 거짓말이다. 언론은 항상 사람들을 자극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고, 집에 대한 공포만큼 사람들을 겁주기 좋은 것도 없다. 625 직후부터 대한민국 언론은 일반 셀러리맨 월급으로는 평생 일해도 집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공포를 조장해 왔고, 정직하게 돈 버는 것이 바보라는 믿음, 남들과는 다른 기묘한 방법으로 출세하라는 것을 부추겨왔다. 무려 70년 동안! 그래야만 언론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세대의 굴레에는 동일한 정책과 동일한 공포와 동일한 선동이 판을 친다. 미디어와 언론, 그리고 정권이 그것으로 효과를 잘 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유난히 요즘 아이들만 버릇이 없고, 어른 말을 듣지 않고, 기묘한 세대로 변신하는 듯 하지만, 사실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요즘 젊은이들만큼 버릇없는 세대도 없다'라고 했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망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굴레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가.
부모에게 무엇을 배우며 자라왔는가?
요즘 음식점에 가서 어린아이들이 어떠한 대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지 보라. 마치 남녀 하녀를 둔 극진한 왕자나 공주처럼, 어린이용 별도 의자에 앉아서 엄마와 아빠의 시중을 받으며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선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도 알지 못하는 나이에 입으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모에 의해 음식을 삼키고, 눈으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상을 섭렵한다. 식사를 마친 가족은 아빠가 무선으로 조종하는 작은 차에 아이를 태우고 상점들의 쇼윈도를 지나간다. 아이는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영상이 흘러나오는 스마트폰을 보는 동안 음식이 입 안으로 자동적으로 들어갔으며, 본인이 무엇에 올라타는지도 모른 채 미니카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자신의 의지로 음식을 집어 올리는 말초신경의 세계, 그것을 자신의 입 안으로 가져가 씹고 삼키는 미각의 세계, 형형색색 기묘하게 생긴 음식을 쳐다보며 학습하는 시각의 세계, 발바닥으로 땅을 밟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체득하게 되는 감촉의 세계를 모두 부모에게 빼앗기고 스스로 체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부모는 자신들이 피땀 흘려 아이를 극진하게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이가 온전하게 스스로 체험하고 느끼고 깨달아야 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문제는 부모도 아이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비극이다. 양쪽 서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뽀샵과 아이돌문화가 상징하는 유리벽의 진실
미디어와 스마트폰, SNS의 무분별한 확장으로 전 세계는 그야말로 하나가 되었다. 일명 오픈월드, 완전히 열린 세계가 되었다는 말이다. 기초생활 수급자라고 불리는 저소득층의 사람들도 스마트폰은 하나씩 있다. 재벌가의 자녀들도 동일하게 스마트폰이 하나씩 있다. 최상층 계급과 최하층 계급은 아무런 장벽 없이 온라인에서 조우할 수 있다.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하루종일 화려하게 치장되고 티끌하나 없이 완벽한 아이돌들이 마네킨 같은 외모로 춤을 추고 여행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약하는 것을 24시간 365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다툼도 하고 쓰레기도 정리해야 하고 더러운 빨래도 해야 하고 월세를 내기 위해서 힘든 알바도 해야 하는 자신의 일상이 어느 날 문득 비참함으로 다가온다. 마치 동네 이웃에서 살고 있는 듯 언제나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 펼치지는 SNS의 가상세계라는 것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친근한 현실인줄 알았는데, 막상 알고 보면 그 얇은 종잇장 같은 액정 사이를 두고 절대 건너갈 수 없는 곳이라는 그 참을 수 없는 괴리. 손에 잡힐 듯 나의 일상을 위로해 주던 온갖 SNS의 환상적인 세계라는 것도 실은 내가 절대 걸어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그 박탈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유아용품에 둘러싸인 유명 연예인들의 육아세계는 그야말로 꿈처럼 단란하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나의 육아는 무저갱의 지옥처럼 온갖 아이울음과 비명과 우울증으로 뒤덮여버렸다는 배신감. 도대체 안 보이는 유리벽이 어디에서 우리를 가로막는다는 말인가.
꿈속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야 했던 운명
21세기의 아이들은 불편 없이 자란다. 음식을 남기면 벌을 받는다는 말 따위는 저주처럼 여겨 언제라도 먹을 만큼만 먹고 맘껏 남겨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알뜰함을 모르고 자란다. 아주 어린 나이에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본인이 스스로 울다가 지쳐서 손을 땅에 짚고 일어서기도 전에 부모가 온갖 위로를 해주며 아이를 일으켜 세워준다.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다가 간혹 달리게에서 2,3등이라도 한다면 부모는 학교에 달려가 순위경쟁을 시키지 말아 달라고 한다든지 혹은 운동회를 폐쇄시켜 달라고 항의한다. 준비물을 챙기지 못해 선생님에게 혼이라도 난다면, 자신의 귀한 자식이 혼나는 것을 못 견디는 부모는 끝내 학부모에게 달려가 남의 집 자식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생떼를 쓰고야 만다. 학교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능력 있는 선생을 못 만났다고 생각하기에 수백만 원이 소요되는 유명 학원강사에게 보내서 막상 학생 본인이 스스로 골똘히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부모는 오로지 투입한 돈만 믿고선 자동판매기 같은 효과를 기대한다. 각자의 가정에 모셔진 귀한 공주와 왕자님들을 타인이 건드리면 큰일 나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왕자와 공주는 스스로 라면이라도 하나 끓일 수 있는가. 이 시대의 왕자와 공주님들은 솔까말, 머릿속으로 그들의 부모들에 대해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고통과 불편은 악한 것이라는 인식.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 것에는 당연히 고통이 들어가 있지만, 그와 반대로 기쁨과 행복도 들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육아의 고통만 부르짖게 된 것은 그 고통과 불편을 느끼는 센서는 극대화시켜왔던 대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센서는 의외로 고장 났기 때문이다. 그 행복센서가 고장 난 이유는 그 부모 세대들에게서 행복 센서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고통만 감지하는 훈련만 해왔으며,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한 훈련만 해온 것은 아닌가. 추운 겨울날 미리 맞추어둔 알람소리에 일찍 기상하여, 두툼하게 옷을 차려입고 자신의 두 발로 학교까지 20분 정도 열심히 걸어가서 도보 중 만나는 눈송이와 혹은 작은 참새들의 재잘거림과 풍경들을 마주하게 되는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부모가 태워주는 차에 올라타서 부모가 입혀주는 옷을 입고 부모가 주머니에 찔러주는 신용카드로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 성인들처럼 마음대로 결제하면서 편하게 밥을 사 먹게 되는 상황에 노출되면서 성장한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괜히 쓸데없이 걸어 다니는 것은 고통이라는 생각,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힘들게 챙기는 것은 불편이라는 생각, 집에 와서 서로 시간을 맞춘 가족끼리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 그러한 일상의 불편함 들은 모두 귀찮은 것들이고 심지어는 부적절한 것이고 지양되어야 하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 속에 미묘하게 숨겨 들어가 있는 행복의 뿌리들까지도 모조리 가위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의 환상은 십여 개의 추함을 동반한다
돈을 모아서 집을 장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면, 영원히 결혼할 수 없다. 결국 결혼을 포기해야 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완성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인데, 완성을 하고 달려가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아무것도 없는 남녀가 서로의 사랑으로 한데 뭉쳐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주 작은 단칸방에서 허황된 환상을 멀리한 채, 서로의 일상 속 맨살과 거친 피부를 보듬어가면서 오늘의 피로와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그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기쁨. 그 기쁨이 하루하루 모여서 인생을 이룬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사고방식 속에는 결혼이라는 단어 속에 '집', '차', '직장', '육아'라는 4가지 단어가 마지 저주처럼 달라붙어서, 꼭 이것이 없으면 결혼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국민 전체가 세뇌가 되어 있지만, 사실 남녀가 서로 너무 좋아서 같이 살려고만 한다면 나머지는 하나씩 채워가는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다. 게임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진짜배기들은 그 기쁨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치트키를 사용해서 아무런 생명의 소모 없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게임을 이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치트키가 얼마나 불행한 것이고, 얼마나 허무하며, 또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둘만 만나서 이룬 작은 환경으로, 서로 알뜰하게 계획하여 하나씩 만들어가는 그 과정. 삶의 행복은 그 발전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 아무리 돈이 많은 연예인도, 아무리 성공한 사람들이라도 그러한 기쁨이 없는 순간에 삶을 살아갈 목적을 상실하고 늪으로 빠진다는 것.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하루보다 더 나은 보답이 주어졌을 때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성취를 느낀다는 것. 무려 10번 정도의 시행착오와 불편을 거치고 나서도 단 한번 소망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아무런 회한 없이 서로에게 웃으면서 우리가 성공했다고 자축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것의 성취는 완전히 상대적이라는 깨달음. 그걸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가야 하는가.
거세를 시켰지만 과연 그래야만 했나
개나 고양이가 유모차에 태워져 아이들보다도 상전대접을 받는 시대이니만큼, 중성화나 거세도 빈번하다고 한다. 나는 현재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그 자세한 과정을 모르지만, 얼핏 듣기에 애완동물을 거세시키면 야생동물처럼 발정 나는 것도 없고, 시끄럽게 소리도 안 내고,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집 안에서 조용히 동물을 키우기에 좋다고 한다. 즉, 거세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편리함을 내리고자 다른 생명에게 가하는 행위이다. 보다 세련되고 보다 그럴싸하고 보다 귀찮음 없이 동물을 인간 곁에 두고 싶어서 생긴 발명품 같은 것이다. 나는 현재 인구절벽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거세된 애완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격한 산업화와 문화발전. 세계 일류기업등의 등장과 높아진 국민소득. 이제는 예전처럼 구질구질하게 아이 키우면서 망가지기 싫은 것이다. 단칸방이니 월세방이니 하는 곳에서 누추하게 결혼생활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젊고 싱싱할 때 자동차도 한 대 끌도 다녀야 하고, 스타벅스도 드나들어야 한다. 아이폰도 하나씩 마련해야 하고, 친구끼리 만나면, 형편이 안되어 무언가 마련하지 못했다는 느낌은 주기 싫은 것이다. 내실은 텅 비었어도 겉보기에는 멋들어지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대. 거세된 개나 고양이는 주인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냥 단순한 장난감으로 살다가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유전학적으로 온전한 생명체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거세된 존재는, 그대로 21세기의 인구절벽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되었다. 인간 스스로의 욕심과 편리함에 맞추어져서 자연 본연의 기능이 제거된 애완동물처럼, 번듯하고 말끔한 겉 모양새를 갖춘 새로운 세대들의 자화상 안쪽에는 생식기능을 잃어버린 일회성의 허상만 남겨둔 것이 아닐까. 이제 그 누가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인가?
틀딱의 경고
과정을 사랑하라. 먼 길일수록 걷고 돌아가라. 걷는 과정과 그 발걸음, 그리고 발에 닿는 감촉을 사랑하라.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직접 아이를 키우는 고통을 축복으로 생각하라. 아이가 목청껏 울고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일찍 깨달아라. 과정에 이르는 고통은 행복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고통이 없으면 살이 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장애물과 고통 없는 삶은 저주라는 것을 각별히 유념하라. 고난이 성숙을 만든다는 것을 절대로 기억하라. 불편함이 모든 발전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시각적으로 보이는 언론과 미디어를 멀리하라. 대신 오랜 시간을 통해 살아남은 현인들의 책을 읽어라. 무언가를 판매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 두 번 듣고 난 다음에 한번 말하라. 돈을 좇지 말고 행복을 좇으라.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말고 눈을 감은채 그 사람의 목소리와 언어와 생각을 보라.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당신은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라.
과연 2070년,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실에는 누가 앉아 있을 것인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