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한번 던져지고 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파도들을 본의 아니게 맞이해야 함을 점차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파도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때면, 인간은 그제야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저 파도를 제어하면서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달려가고 있는 버스, 혹은 방금 출발하려는 버스가 있다면 얼른 달려가 올라타고 가고 싶어 진다. 그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에 올라타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성공한다고 해보았자 기쁨이 그다지 크지도 않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정차해 있는 버스에 슬그머니 올라가서 가만히 기다리면 언젠가 버스는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인생의 버스는 항상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 김영하 -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주어진 환경을 제어하고 싶어 한다. 때에 맞추어 밥을 짓고, 날카로운 칼로 연필을 깎고, 빗자루로 정교하게 청소를 할 수 있다. 그러면 행복이 늘어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빗자루나 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난데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일수록 운칠기삼을 읊조린다. 눈웃음을 치면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고약하고 능구렁이 같은 그네들의 미소 속에 뼈저린 인생의 경험들이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절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혼자서 스스로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타의건 자의건 주변 여건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은 한데 모이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간에게 도움은 필수적이며, 도움이 오고 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의 모럴이 새롭게 정의된다. 그것이 문명으로 발전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도움이 모이면 비록 파도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지라도 파도를 견딜 수 있는 힘을 만들 수 있다. 도움과 협조는 그만큼 강하다. 파도는 배를 산산조각내고 인간을 으깨어 놓지만, 그 힘보다도 강한 것이 있다면 인간은 기꺼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손에 넣기 위해서 애를 쓴다. 주변의 도움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인간은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도움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다. 그것이 세 번째 문제이다.
조바심, 미련함, 유한성. 이 세 가지는 인간을 정의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단점을 우회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조바심은 인내로 이겨낸다. 미련함은 시행착오로 이겨낸다. 그리고 유한성은 종교로 이겨낸다. 지금까지 잘 해온 것이다.
이 세 가지를 고통 없이 받아들이려면 인간이 부족하다는 자각을 해야 한다. 서투른 일개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겸손은 면역의 일종, 혹은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형상 지을 수 없는 파도가 갑자기 몰아닥쳐서 내 인생의 고난을 만들어내면,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린다. 내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 내가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 나를 잘 따랐던 사람. 나를 인정해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기대를 건다. 그들에게 다가가 에둘러 말해보기도 하고, 손길을 요청해보기도 하고, 나의 사정을 설명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기 일쑤이다. 마치 연극을 하듯 그들은 은근히 나를 피하고 있고, 교묘하게 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으며, 예리하게 나와의 거리를 넓히는 것이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하나같이 말이다! 아! 내가 잘못 보았던 것인가! 내가 착각하면서 살았던 것이란 말인가!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들은 결코 내가 기대했던 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 신해철 -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어려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 혹은 환경은 내가 기대하였던 곳, 내가 바라보았던 곳, 내가 기다렸던 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 내가 평소 눈길을 많이 주지 않았던 사람, 혹은 내가 오래 머물지 않았던 공간, 혹은 진실하게 인식하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씨앗이 자라난다.
나의 가식적이고 표면적인 존재로서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나 자체의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흔적이 녹아든 공간이 알게 모르게 나를 잉태하였던 것이다. 나의 평소 습관, 나의 평소 말투, 나의 평소 신념이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인생길에 뿌려졌던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 목표했던 시공간에 뿌린 씨앗은 나의 오만한 기대였을 뿐 세상의 뜻과는 상관없이 배태되지 않고 대지의 표피에서 사라진다. 반면, 세상이 원하고 기다리던 씨앗은 내가 원하든 원치안든 나의 흔적을 고스란히 흡수해 간다. 스스로 미화했던 자아가 보란 듯 소멸되고, 멸시했던 자아가 얄밉게 되살아나는 질서! 우리 선조들이 이 척박한 밭에 씨를 뿌리면서 농사꾼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이 장엄한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를 낮추면서 기도했던 그 겸양의 미덕. 씨앗은 사람이 키우지 않는다. 결국 하늘과 바람과 대지의 뜻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무리 힘든 시절이라도 어디선가 예기치 못한 도움이 손길이 온다
-정경심-
내가 살아가는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과 이 바람과 이 하늘이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와 뜻에 맞는다면 파도가 내 앞에서 물러갈 수도 있고, 나의 흔적을 모두 받아들인 씨앗이라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올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올지 모른다. 다만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이 운명의 신을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기간, 그 간격의 틈새에 비밀이 숨어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바로 그 틈새에 숨어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할 수 있고, 현재에 충실하며, 언젠가는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