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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Dec 09. 2023

부모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

20세기말 한 때, '손님은 왕'이라던 시절이 있었다. 음식점이건 미용실이건 돈을 지불하기 위해서 온 사람을 극진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가치관이었다. 나는 도대체 그 말이 어디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짐작으로는 아마 일본에서 건너왔으리라 예상한다. 일본 특유의 상점문화. 과도한 친절과 예의를 가장한 물질주의. 아마도 약육강식의 지배구조를 일찌감치 터득한 국가에서 추구한 자본주의의 형식적 모럴 같은 것이었으리라. 


나는 그러한 가치관이 오래 전 개발도상국었던 우리나라에 스며든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소위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 '갑질'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돈이 많은 사람이 갑질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갑을 열고 있는 사람이 갑질하는데 유리하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한다거나, 음식점에서 음식값을 지불하는 상황에서 지갑을 여는 사람이 갖는 이름 모를 우위의식을 자주 경험한다. 마트 캐셔는 하인 같은 위상을 갖게 되고 손님은 주인 같은 위상을 갖게 되는 그 기묘한 분위기. 도대체 그 분위기의 족보는 무엇일까.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캐셔가 조금만 늦게 계산을 처리해도 뒤에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 궁시렁 거린다거나, 혹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 계산 좀 빨리 처리합시다'라고 윽박지르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러한 것이 없어졌는가?


4~5년 전 즈음해서 TV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백종원 아저씨가 그런 말을 했더랬다. 장사를 시작할 때 고객을 무턱대로 왕으로 모시지 말고, 목욕탕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 정도로 대하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 말은 손님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반대로 손님을 무턱대로 왕으로 모시라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 말은, 가게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관리하려면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식당에서 음식을 제대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손님을 왕으로 모시면서 돈을 구걸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가게에 찾아온 처음 손님 한두 명만 제대로 대해주고 나머지는 지쳐서 그냥 그저 그렇게 대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또한 가게라는 곳은 엄연히 두 당사자가 만나서 한쪽은 제조품을 그리고 한쪽은 돈을 서로 교환하는 곳일 뿐이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바로 그것이다! 가게는 우위를 가진 손님이 열위를 가진 주인에게 돈으로 갑질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다른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이 돈을 들고 와서, 그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서로 맞교환을 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만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커피숍을 운영하는 지인을 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엄마나 아빠가 아이를 커피숍에 데리고 와서 아이들의 부주의로 잔을 깨뜨리거나 음식을 엎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손님들은 절대 손대지도 않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도 않고, 주인이 알아서 스스로 달려와서 엎질러진 음식을 다 치운다음에 음식을 다시 만들어와야 하고, 깨진 유리잔을 재빨리 치워서 다른 잔으로 교환해주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그러한 상황에서 팔짱을 낀 채, "여기 이거 치워주셔야죠"라는 말을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린다는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잘못한 것일까.


당연히 아이와 그 부모가 잘못한 것이다. 가게는 손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곳이 아니다. 손님은 돈을 가지고 와서 커피와 교환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다. 그리고 가게주인은 교환물질인 돈을 받고 커피를 건네주는 사람이다. 두 당사자 모두 동등한 가치를 서로 교환하는 동등한 인격체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들의 실수로 음식을 엎거나 잔을 깨뜨렸다면 당연히 가게 주인에게 사과를 하고, 원칙대로라면 파손된 유리잔의 가격도 물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고 원칙이다. 물론, 가게주인들은 예의와 도리상 손님에게 배상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음식이 엎어졌으면 예의와 도리상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음식을 다시 만들어줄 것이다. 물론 예의와 도리상 말이다. 


위와 같은 상황은 부모에게 잘못 배웠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릇을 깨고 음식을 엎지른 부모가 팔짱을 끼고 뻔뻔하게 가만히 기다리면서, 주인이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모두 목격한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될까. 보나 마나다. 또한 그 부모도 그 이전의 부모에게 그렇게 배웠음이 틀림없다. 없고 배고프던 시절에 어쩌다 만져본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갑질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돈을 가지고 있다면 우월하다는 의식이 문제의 근본이다. 그것을 '물질만능주의' 혹은 '배금주의'라고 한다. 물론 돈으로는 사실 많은 것을 할 수는 있다. 돈 앞에 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신거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 여러 선진국 어디를 가보아도,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타인에게 굴복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지갑을 연다고 해서 우월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나를 우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보석금을 내고 구치소를 나오는 사람에게 경외심을 표하는 사람이 없듯이.


신도시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마트 캐셔들은 거의 절반 이상 당신보다 잘 살고 돈도 많다고 보면 된다. 70~80년대처럼 못 먹고 못살아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커피숍과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궁핍해서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손님들보다 돈도 많고 사회생활의 경험도 많은 이들이 자영업자들이다. 


음식을 만드는 실력도 없고, 오늘 하루의 생계비용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궁색한 가게라면, 손님을 극진한 왕으로 모시면서 하인행세를 할 수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느 음식점을 가도 음식을 대충 만들어서 굽신거리면서 돈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제대로 된 매뉴얼과 식품위생과 안전사항을 지켜가면서 철저한 준비를 가지고 창업하는 시대이다. 게다가, 음식이 맛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곳을 가지도 않는다. 이미 가게라는 곳은 돈을 내려는 사람과 돈을 받으려는 사람이 둘 다 모두 프로 선수들인 공정한 그라운드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게라는 곳이 돈과 물질을 서로 동등하게 맞교환하는 장소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치라. 가게 안의 공간은 놀이터가 아니요, 엄연하게 타인이 소유한 재산이기에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치라. 본인의 부주의로 그릇을 깼다거나, 음식물을 엎질렀다면 주변 사람들과 가게 주인에게 죄송하다고 말을 하도록 하고, 파손된 재물을 배상해야 함을 명확히 가르치라. 당신이 내는 돈은 면죄부도 아니오 만능 해결사도 아니다. 단지 어떠한 물건과 맞바꾸기 위한 도구일 뿐. 


어느 날, 성질을 참지 못한 채, 느리게 계산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과 짜증을 감수해야 했던 마트 캐셔 당사자가, 당신이 놀라간 친구 집에서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친구의 어머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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