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포스트잇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back Jul 27. 2024

직업과 성실성

성실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뜨거운 것인가 차가운 것인가

이쪽인가 저쪽인가

직선인가 곡선인가

셀 수 있는가 셀 수 없는가

그렇다면

과연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여기 도박에 중독된 판사가 있다

마치 현대인들이 말초신경을 단련하기 위해서

본인도 모르게 다리를 떤다든지 혹은

습관적으로 폰을 만지작 거린다든지 하는 종류의

단순함에 빠져들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중하는 반복의 행태,

즉,

판사는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는 

'홀짝'이라든지, '오엑스'같은

단순한 게임에 중독된 것이다.


그 판사 본연의 업무는 성실함을 요구한다

학창 시절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할 때에도

애매한 답은 모두 제쳐두고 

오로지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해답만 외웠을 것이다

그 답은 4가지 선택지 중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분절된 상황의 경우를 공부하여 가장 일치하는 것을 고르는 훈련을 한다

학습의 성실성을 연마한 예비판사는

모든 인식을 레고블록 같은 입방체의 규격으로 체계화한다

그래서 계량화하고 수치화해서

본인이 목표로 한 대학입학점수, 임용가능점수, 면접성공 확률을 계산해 낸다.

그의 머릿속은 아주 작은 상자들로 채워졌고 

모든 것에 일련번호라도 새겨있는 듯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선을 그어 확실하게 나눌 수 있는 선택과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가치를 포함하는,

직업적 성실함을 이룬다


한편 인간의 삶이란

직선이라기보다는 구불구불한 곡선이고

입방체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완만한 구릉이고

분절된 4지선다형이라기보다는 주관적 논술형이다

노련한 인문학자들은 모두 이러한 유연성,

즉 불확실하고 난데없고 돌연한...

인간존재의 특성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소설을 쓰는 것이고,

그들의 소설 속에는 항상,

하찮고 보잘것없고

법에 저촉되는 짓을 반복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짓도 하고

소모적인 논쟁도 하고

유치하고 염치없는 행태를 보이면서도

그래도 끊임없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무언가 '가득 차 있고 출렁거리는'

인간의 삶이 묘사되는 것이다.


오로지 책상에만 앉아서

인간이라 부를 만한 다양한 사람은 만나지도 않으면서

점수가 달린 문제만 풀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의 다양한 삶을 잘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룬 직업적 성실함은

말 그대로 직업을 위한 치밀함,

오로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성실함이 된다.


만약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

타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직업을 갖게 되는 경우

타인의 삶은 4지 선다의 도마 위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타인의 삶은 

유려한 곡선을 갖지도 못하고

뜨거운 온도를 갖지도 못하고

울고 웃으며 항상 움직이는 감정마저 빼앗긴 채

양자역학의 이분법적 판결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빌라도가 그러하였고

아이히만이 그러하였고

을사오적이 그러하였고

친일민족반역자들이 그러하였고

여기, 도박에 중독된 판사가 그러한 것이다


중요한 판결을 계속 미루어가면서

단순한 이분법 도박놀이에 중독된 판사는

옆에서 근심스럽게 물어보는 지인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항소하라지 뭐"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삶을 알아야 한다.

모르겠거든 책이라도 읽어야 한다.

에세이, 수필, 소설, 시를 그야말로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

읽고나서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타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들을 제멋대로 설치게 놔두고 있다.

내 인생이, 

도박에 중독된 판사의 메모지에 갇히게 만들지 않으려면

바꿔야 한다.

무조건.


"나는 변호사였던 시절에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로 변호사를 찾아오는지 배웠다. 많은 법률 사건에는 변호사가 간과해서는 안될 인간적인 문제들이 깔려 있었고, 나는 이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 -알베르트 키츨러, 철학자의 걷기 수업 중中-


끝.

매거진의 이전글 김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