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말을 인정하게 된 시기

by Silverback

한 때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다 허술하고

내가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진짜다


고등학교 생활을 할 때에도 그랬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그랬고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도 그랬다


어찌 말하는 것들이 죄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데다가 허구한 날 뻔한 말들만 하는가

그걸 누가 모르는가?

나도 다 아는 내용인걸

어쩌다가 내가 예상한 듯한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그냥 절반도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거나 말을 막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러한 오만함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그 부류가 무엇인고 하니,

묘하게도 나와 몇 년 간 계속 주기적으로 만나게 된다거나

혹은

싫어도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하게 된 사람들

아니면

오랫동안 그 존재를 계속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특징은

꾸준하게 오랫동안 스스로를 특정인들에게 노출한다는데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오랜 기간 동안

일관된 언어와 생각을 표출하는 사람이라는 것!


사실 나는 사회 초년생까지

누군가를 오랫동안 관찰한다거나

관계를 맺어오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

혹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가치관과 언어, 외모, 습관, 환경은 항상 변했더랬다

물론 나도 그랬고.


그런데,

이 세상에는

생각과 행동, 습관과 언어에 있어서 지독한 일관성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 채

오랫동안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높은 지위에 있다거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아주 평범하거나

어쩌면 생각보다 수줍어하고

얼핏 보기에 약간 부족한 듯하여

오히려 스스로를 숨기려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타인에게 말을 할 때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되받아치지도 않는다

그냥 나지막하고 고요하게 읊조릴 뿐이다


반론이 제기되거나 지적을 당한다 해도

특별히 변호를 한다거나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지도 않는다

그냥 우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한번 더 강조할 뿐이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일단 짜증이 나게 되어 있다

변변치 않아 보이는 평범한 사람이

장난하듯 중얼거리면서 말을 해오기 때문이다

감정도 없어 보이고 뉘앙스도 없어 보이니

무심하고 귀찮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러한 말을 흘려듣고 나서

내 감정의 기복이 며칠 지나 제자리를 찾아올 무렵

희한하게도 그 언어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 혹은 일 년이 지나면서

그 언어가 마치 싹을 틔우는 나뭇가지처럼

느릿하지만 아주 성실하게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마치 점점 더워지는 햇살 때문에

스스로 옷을 벗게 되는 어린아이처럼

'편견'과 '아집'이라는 옷을 천천히 벗게 되고

'오래 지속됨'과 '평범한 진리', 그리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이라는 햇살을 발견한다


그때가 바로 불혹의 나이였다

하지만 그제서라도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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