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쌓여 신뢰가 되는 순간
나는 벤지를 키운 게 아니라,
벤지를 매일 읽었다.
꼬리가 뭉툭하니 녀석의 기분을 몸짓으로 읽어야 했고,
말이 없고 조용하니 녀석의 하루를 표정으로 알아채야 했다.
오늘은 왜 저기 앉아 있지?
저 하품은 지루해서가 아니라 무안해서였나?
아기처럼 '으으응' 소리를 낼 때는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늘 벤지를 관찰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만 벤지를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벤지도 나를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단 걸.
개는 기억으로 말하는 존재다.
좋은 기억이 쌓이면 신뢰도 쌓인다.
내가 어떤 음성 톤으로 말하는지,
쓰다듬는 내 손이 거친 지 부드러운지,
어떤 행동을 칭찬받는지,
어떤 상황이 불안한지, 편안한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개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쁜 기억이 없는 하루하루다.
신뢰는 그렇게 쌓인다.
상처 없이, 놀라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기대하면서.
벤지는 나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내가 녀석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매일의 기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주 벽을 보고 멍하니 앉아있던 녀석을 위해
한동안 늘 귀가할 때 장난감을 사 왔다.
"벤지, 오늘은 이걸 사 왔어!" 하면 좋아했고,
그것을 다 뜯어질 때까지 잘 갖고 놀았다.
마켓을 다녀오면 뭘 샀는지 보여주고 냄새를 맡아보게 했다.
쓰다듬으며 "벤지는 참 착하고 사랑스러워."라고 자주 칭찬해 줬다.
벤지는 조심스러운 개였다.
먹을 것을 주면 잠깐이라도 꼭 냄새부터 맡고 나서야 받아먹었다.
그런데 또, 조심스럽지 않은 개이기도 했다.
현관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잽싸게 튀어나가
복도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벤지! 벤!" 부르다 속이 터져,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가 잡아와야 했다.
산책하다 리드줄을 놓지 기라도 하면
"옳다구나!" 하며
벤지는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나는 늘 줄을 꽉 쥐고,
때로 당기고 풀어주고 하며
매일 산책 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던 벤지가 어느 날부터
냄새도 맡지 않고 내가 주는 음식은 바로 받아먹기 시작했다.
현관문이 열려도, 복도를 멀리까지 쏜살같이 뛰어 나가지 않았다.
근처를 조금 돌다가,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확인하면
살짝 더 멀리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그리고 산책을 나가면 늘 내 앞에서 바삐 걷지만,
줄이 잘 연결되어 있는지 살피며 신경을 썼다.
간혹 줄을 잠깐 놓쳐도,
벤지는 몇 발짝 앞으로 가다가 꼭 뒤를 돌아보고
적당한 거리에 서서 줄을 잡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내가 바로 따라가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 “다시 잡아줘.” 하듯 곁에 선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리드줄을 든다.
우리는 이제,
잘 연결되어 있는 반려견과 견주다.
어제는 미용실에 함께 갔다.
머리 하는데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그동안 벤지는 이동 케이지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케이지 위로 몸을 내밀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세 시간쯤 지나자, 답답했는지
벤지가 '으으응'하면서 울었고,
미용실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모두 귀엽다며 웃고 난리가 났다.
"여기 개가 있는지도 몰랐네."
"어쩜, 이렇게 얌전하니?"
다들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벤지는 으쓱해했다.
주인의 양해를 얻어
내가 앉아 있는 미용실 의자에
잠깐 올려주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디든지 함께 다닐 수 있는 사이.
기다려 줄 수 있는 사이.
그것이 '반려라는 이름의 사이'이다.
벤지와 나는, '반려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