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외판원이 집집마다 다니며 책을 팔았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도 외판원이 방문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 큰 사람이 되는 거 아시죠?"
외판원이 화려한 입담을 펼치려는 순간, 엄마가 단호하게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우리 애는 겨우 세 살이에요. 아직 글도 못 읽는다고요"
사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전집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그쯤 되면 물러서겠거니 싶었지만, 외판원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더란다.
"책을 일찍 읽으면 한글도 빨리 깨우칠 수 있어요! 한글을 빨리 떼야 공부도 잘하고 공부를 잘해야 성공하죠! 어머니, 지금 책에 투자하시면 아이가 틀림없이 성공한다는데 관심 없으세요?"
그 말에 엄마는 살짝 동요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집을 사주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내가 책 읽는 소리가 들렸단다.
"어머니, 아이가 책을 읽는데요?"
"네? 설.. 마요"
사실 그건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 까막눈이던 내가 그림을 보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꾸며대는 소리였다.
외판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엄마를 설득했다.
"이야~ 이렇게 말도 잘하니 책만 사주면 되겠어요! 보나 마나 책도 금방 읽을 테고,, 아이가 아주 똑똑해 보이는 게 공부도 잘하겠네요! 어머니 좋으시겠어요~~“
외판원이 넉살 좋게 내 칭찬을 하자 엄마는 어깨가 으쓱해져서 60권짜리 그림책 전집을 12개월 할부로 덥석 구매하고 말았다. 그것이 내 인생의 첫 책이자, 우리 집의 유일한 책이기도 했다.
난 그 책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모험이 가득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좋아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책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내 일상에도 뭔가 재미있고 멋진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별다른 유희거리가 없던 그 시절 책을 읽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엄마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설거지하거나 청소할 때면 너 혼자 책을 꺼내 어찌나 열심히 보던지.. 마치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조잘대면서 말이야. 엄마는 세상에서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좋았어. 이유가 뭔지 알아?"
엄마가 잠시 말을 끊었다. 어려운 형편에 전집값을 갚느라 허리띠를 바짝 조여맸을 젊은 날의 엄마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넌 엄마처럼 살지 않길 바랐거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똑똑하게 살면 좋겠다 싶었어.. 책을 읽으며 조잘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소원이 이뤄질 것만 같아서 참 행복했지.."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전집을 꽤 오랫동안 열심히 읽었다. 친구가 없어 외로운 날은 물론 엄마에게 꾸중을 들어 속상한 날에도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 주는 것 책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걱정과 고민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고,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 못 할 고민으로 끙끙댈 때도, 위로나 힐링이 필요할 때도 책을 꺼내든다. 책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나면 그때까지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고민들도 어쩐지 조금은 시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책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좀 더 가까워지고 멀어지고의 차이는 있지만 늘 내 곁에 책이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땐 그 시절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엄마의 기대가 느껴졌다.
그렇게 책이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