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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May 17. 2021

나는, 종이 피아노 같은 사람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날. 이 본체로 삼십 평생을 살았는데 갑자기 나라는 사람이 낯선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를 표현하는 말은 뭘까


나를 표현하는 말이라. 문득 궁금해졌다. 도저히 모르겠다. 가만있자, 친구들한테 한번 물어볼까?


나를 10년 이상 봐 온 친구들은 나를 생각하면 어떤 단어들을 떠올릴까. 조용하던 단톡 방들을 돌며 “얘들아, 나를 생각하면 어떤 단어가 떠올라?”하고 설문조사를 시작했다.


받은 답들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이하 친구들 카톡

지원 : 생동감 있고 밝은 것들
세영 : 똥꼬 발랄, 커피
충범 : 엉뚱, 끈기, 정
성영 : 열정
선경 : 해맑다, 내면이 건강한, 웰컴 투 동막골
윤희 : 발랄, 똑 부러짐
소연 : 귀여움, 프리지어
선용 : 사랑스러움, 발랄한, 동화 같은 로망
미라 : 엉뚱한 표정


10년 이상 친구로 함께 지내면서도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처음이라 묻고 답을 듣는 과정이 그것대로 신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난 친구들이 답해준 모든 단어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사실 대놓고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묻는 친구에게 부정적인 단어를 ‘턱’하고 내밀만한 사람은 애초에 친구로 두지 않은 것도 큰 몫을 했다. 그래도 그들이 나에게 내밀어준 저 값진 단어들이 ‘나의 단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건 그들과 함께 했던 10년이 넘는 세월이 있고, 또 신기하게도 비슷한 단어들이 겹치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대답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았던 단어는 ‘엉뚱’과 ‘발랄’. 이를 ‘똥꼬 발랄’이라고 표현한 친구도 있었고, 질문을 듣고 바로 웰컴 투 동막골 팝콘 신을 얘기한 친구도 있었으니. 잠시 생각했다. ‘난 그동안 친구들에게 해맑은 바보쯤이었던가?’



웰컴 투 동막골의 단연 해피한 장면



돌아보면,


내 인생의 장르는 멜로나 판타지보단 '시트콤'에 가까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나올만한 에피소드가 생겼다. 거기에 큰 몫을 했던 건 나의 엉뚱함과 발랄함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에 <원하는 악기로 원하는 곡을 자유롭게 연주하기>로 수행평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난 평범한 리코더가 아닌 생뚱맞은 피아노를 떠올렸다. 어릴 적 이후 만져본 적도 없는 피아노를. 거기에 더해 내가 선택한 곡은 무려 이루마 슨생님의 'may be'.


문제는 어디에도 연습할 피아노가 없다는 것. 연습은 안 했는데 날짜는 다가오고, 죽어도 평범한 리코더는 불기 싫었다. 해서 생각한 묘안이 '종이 피아노'였다. 두꺼운 종이를 사서 그 위에 건반을 따라 그려놓곤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R=VD를 되뇌며 상상 피아노를 연습했다. 수행평가 당일, 종이 피아노와 달리 누르는 대로 소리가 나는 진짜 피아노 앞에서 한 소절 이상을 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무대공포증을 하나 얻게 되었다.



친구들의 카톡을 보면서 그리고 종이 피아노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면서, 조금 서글퍼졌다.


10대의 나는 피아노가 없으면 종이로 피아노를 만드는 유쾌한 아이였는데, 30대의 나는 여전히 종이 피아노를 가슴에 품고 있는가.


그 질문에 마음껏 끄덕일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눈 앞에 피아노가 없는 건 똑같은데 마음가짐이 많이 헐거워졌다. 서른이 되는 동안 내게 피아노가 없음을 수없이 인정하느라, 감히 종이 피아노를 만들 수 있음을 잊고 살았다.


여전히 종이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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