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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Sep 23. 2020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떼요!

신규라고 아메리카노를 먹을 순 없어요.


"자자, 뭐들 마실래? 나는 아메리카노"

"저도 아메리카노 마시겠습니다."

"저도 아메리카노요."

"저도, 같은걸로요"


"자, 막내 너는? 너도 아메리카노?"

"아니요.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테요!"




100미터 밖에서 실눈으로 봐도 신규 티가 나던 때가 있었다.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처럼 처음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나도 티가 났다. 몸은 경직되어 있고, 입은 딱풀 발라놓은 것처럼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인사만이라도 우렁차게 하자.' 다짐하고 하루를 시작했지만, 길에서 선배님들만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출근이라도 일찍 하자' 하고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보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일 밖에 없었다. 시험도 합격했고, 교육원도 수료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출근해서 하는 일은 조금 모르는 일, 정말 모르는 일, 아예 모르는 일을 구별해서 선배님한테 물어볼 것들을 선별하는 일이었다. 옆자리 선배님들은 이미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 보였기에 감히 질문을 자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속도 모르고 전화는 하루 종일 울려댔다. 절차를 설명해달라는 민원인에게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걸 아는 척 대충 설명해드릴 수도 없어서 일단 전화 내용을 자세하게 메모하고 정중하게 양해를 드렸다.


"네, 어떤 점이 궁금하신지 잘 알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신규라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 정확한 지 좀 더 알아본 뒤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A "아유~ 그래요. 아직 얼마 안 됐으면 적응하느라 힘들겠네~ 천천히 연락 줘요"

B "아... 네. 급하니깐 바로 전화 줘요."

C "장난해? 당신이 신규인걸 내가 왜 양해해줘야 되는데, 야 윗사람 바꿔"


이런 류의 대답들을 번갈아 들으며 업무편람도 찾고, 선배님한테도 여쭤보며 하나하나 배워갔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시간에는 신규에 대한 호기심이 이어졌다. 나이부터 시작해서 출신학교, 고향, 남자친구의 유무까지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질문들을 아무렇지 않게 또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고 멋쩍은 웃음들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자, 커피 한잔 하고 들어가지."


하고 들어간 커피숍에서는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쳤다. 마치 중국집에서 음식값을 계산하는 누군가 "짜장면"을 외치면 모두가 그것으로 통일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몸은 강렬하게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원했다.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바닐라 시럽이 혈관을 타고 내려가야만 오후를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테요!"


내가 하루 중 가장 또박또박하게 그리고 생기 있게 내뱉는 말이었다.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조용하게 "네... 네.. 하하..." 대답하던 내가 반짝이는 눈을 하고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당차게 외치는 게 웃겼는지 다들 조금씩 웃었다. 시원하고도 달콤한 바닐라라테 한 모금은 기죽어있던 나를 금방 행복하게 했다. 오전 내내 애썼던 나에게 주는 보상이었고, 또 쓴 오후를 버텨내기 위한 준비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커피숍에선 늘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시켰다. 따뜻한 봄날에도, 추운 겨울에도 왠지 회사에선 차가운 얼음을 가득 넣은 달콤한 바닐라 시럽이 들어간 라테가 당겼다. 하루가 뜨겁고, 씁쓸했기 때문일까. 처음 발령받았던 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님과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커피숍에 갔다.


"너는 아이스 바닐라라테 먹을 거지?"

"네! 저는 아이스 바닐라라테요"


나의 소소한 취향을 기억해주는 따뜻한 선배님 덕에 이 날은 안 그래도 달콤한 바닐라 시럽이 더 달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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