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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Oct 12. 2020

뛰어내리기 0.1초 전의 기억

유난한 하루의 끝에서 떠올리는


프라하의 하늘로 뛰어내렸다.


유럽여행을 갔을 때 스카이다이빙을 했었다. 다이빙의 과정은 이렇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유언장 비슷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면 주의사항과 포지션 등을 교육받고 비행기에 오른다. 다이빙 포인트에 점점 가까워지면 비행기에 함께 탄 전우들(?)끼리 “만약 죽더라도 꼭 천국에서 만나”와 비슷한 살벌한 손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러곤 한 명씩 차례대로 뛰어내린다. 가장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은 내 앞사람이 뛰어내리는 걸 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죽으려고 환장했지, 이걸 왜 한다고 했어. 어떡해,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할까?’라고 말할 찰나.


2016.11.4. 프라하 하늘

파트너가 나를 친절하게 떠밀어준 덕에 이미 난 벼랑 끝이란 걸 깨닫는다. 이 사진은 하늘로 뛰어내리기 0.1초 전이다. 언뜻 보면 활짝 웃어 보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울기 직전이다. 비행기에서 발을 떼면 큰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먼지가 된 기분이다. 숨이 막혀 ‘악’ 소리조차 못 내고 태어나 처음 맞아보는 강풍에 뺨을 맞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와중에 평소 얌전하게 있던 귀 속 고막은 “나 이제 터진다!!”라고 소리치며 부풀어 오른다. 혼돈의 시간이 몇 초쯤 지나면 낙하산이 펼쳐지며 아늑한 프라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와’ 하늘을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새들은 매일 이런 기분으로 살았던 거야? 이렇게 황홀한 기분으로? 애꿎은 새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만큼 하늘은 나는 건 벅찬 감동이었다. 발아래 놓인 세상은 두려움을 이겨 낸 나에게 ‘이봐, 도전하길 잘했지’라며 토닥여주는 듯했다.  




유난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날이 있다.


할 일은 쌓여가고 전화는 계속 울린다. 이거, 저거 해달라는 것들이 자꾸 늘어가서 내가 뭘 했어야 했는지 까먹는다. 그 와중에 나를 찾아온 민원인은 나에게 다짜고짜 고함을 친다. 걸러지지 않은 그의 고함을 듣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뭐라도 말해보려고 입을 열다가 이내 삼킨다. 애꿎은 심장만 크게 쿵쾅거린다. 마음이 쪼그라들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눈은 퀭하고 숙인 고개가 무거워 들어지지 않는다.


'원래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오는 거야. 오늘이 유난히 그런 날이야.' 멘탈이 부서지는 걸 겨우 부여잡고 오늘 해내야 할 일들을 처리한다. 서툴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곱씹으며 넘긴다. 그러다 내 얼굴에 삿대질을 하던 그 민원인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고개를 흔든다. 이럴 때가 아니야. 당장 내일 있을 재판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집중한다. 그러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직장에서 있었던 일은 직장에 두고 나오자. 정문을 나서는 순간 생각하지 말자. 매일 다짐했지만 그런 다짐은 이런 날 쓸모가 없다. 힘없는 걸음으로 지하철을 탄다.


집에 오자마자 갑옷 같이 느껴지던 옷을 벗는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틀어 샤워한다. 잔뜩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내고 고생스러운 얼굴을 가만히 본다.


"고생했어. 잘하고 있어. 오늘 얼마나 힘들었어"


내가 나에게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언제부턴가 위로도 셀프로 하게 됐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려면 오늘의 유난함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버겁다. 그럴 때 좀 오글거려도 왼팔로 오른팔을, 오른팔로 왼팔을 껴안고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게 신기하게 따뜻하다.


유난한 하루의 끝에서, 비행기 끝에 있던 나를 떠올린다.


비행기 끝에서 뛰어내리기 0.1초 전의 나는 초라하지 않다. 마음이 쪼그라들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얼굴에 숨도 못 쉴 만큼 센 바람이 불었지만 마음은 부풀어있었고 고개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극한의 두려움을 향해 스스로 발을 내밀었다. 무모하게 용감했던 그날의 내가 초라한 오늘의 나를 이긴다. 하루 종일 고개를 흔들어대고 눈을 세게 감았다 떠도 잊히지 않던 초라하던 나를 이겨준다. 저 비행기 끝에 서있을 땐 이렇게 두고두고 곱씹게 될 줄 몰랐는데, 그날의 무모함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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