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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Nov 13. 2020

직장상사와 먹는 뜨거운 뚝배기 음식

누구보다 잘 먹는 방법

직장인들에게 오후 세시는 점심 메뉴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이다. 점심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면 졸음이 쏟아지는 시간이고, 부실한 점심을 먹었다면 어김없이 출출해지는 시간이다.


오후 세시, 친한 동기에게 메신저가 왔다.


"윽, 너무 배고프다. 잠깐 나가서 간식거리라도 사 와야겠어"

"응?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나 보네. 뭐 먹었어?"

"나? 추어탕!"

"추어탕? 몸보신할 때 먹는 그 든든한 걸 먹었는데 왜 배가 고파?"


"아니, 다들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음식을 어찌 그리 빨리 드셔?
입천장 다 데어서 난 얼마 못 먹었어."


동기 말을 듣고 신규일 때 생각이 났다. 밥 먹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장에 들어와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흡입러'들은 주변에 너무 많았다. 평소 나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정도면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편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면 누가 더 빨리 먹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들 빠르게 '흡입'하셨다. 빠르면 5분, 길어도 10분~15분 사이에 식사가 마무리됐다. 모두 식사를 마치고 앉아있는데, 그 앞에서 꿋꿋하게 밥을 먹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민망하고 뻘쭘했다. 천천히 먹으라며 뚫어져라 보시는 그 눈빛 앞에서 난 결국 숟가락을 놓았다. 하지만 밥을 남기니까 오후에 배가 너무 고팠다. 그래서 빨리 먹어보려고 노력도 해봤다. 숟가락 위에 최대한 많은 양의 밥과 반찬을 올리고 한입에 넣었다. 밥을 많이 먹을 수는 있었지만 자주 체했고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차갑거나 미지근한 음식은 그나마 나았다. 문제는 뜨거운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뚝배기에 나오는 국밥"은 가장 하이레벨이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식히는 동안, 내 앞에 계신 분들의 뚝배기는 반 이상 비어있었다. 심지어 상사분들의 최애는 많은 확률로 국밥이었다. 점심메뉴는 자주 국밥이었고, 살기 위해서 나는 전략을 짰다.


국밥을 먹는 방식의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국밥이 나오자마자 뜨거운 밥을 몽땅 말아서 먹는 취향이 있는데, 이 취향은 '흡입러'들과 함께하는 점심 식사에서 매우 불리하다. 뜨거운 국물에 뜨거운 밥이 합쳐지면서 극강의 뜨거움이 생긴다. 그 뜨거움에 입천장이 남아나질 않고, 때문에 속도가 더 늦어진다.


나오자마자 밥을 바로 국에 말아버리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요.

<뜨거운 뚝배기 음식 야무지게 먹는 법 A to Z>


1. 먼저 건더기! 건더기를 공략한다. 뜨거운 국밥 속에 들어있는 각종 건더기들(추어탕이라면 시래기, 순대국밥이라면 순대, 콩나물 국밥이라면 콩나물 등)을 먼저 건진다. 그것들을 앞접시나, 밥 위에 올려 식힌다.


2. 밥을 한 숟갈 뜨고 그 위에 건더기들을 올려 먹는다. (국물을 머금은 건더기를 밥 위에 올려 먹으면 을매나 맛있게요?) 그렇게 밥의 1/3 정도를 공략해 먹는다.


3. 그동안 뚝배기 안에 국물은 꽤 식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밥을 말아 버리는 것은 이르다. 숟가락 위에 올린 밥을 국물에 적셔 먹는 걸 추천한다. 약간 식어 딱딱해진 밥을 여전히 따뜻하게 즐길 수 있다. 밥의 2/3 정도를 이렇게 공략한다.


4. 마지막 밥이 1/3 정도 남았을 때, 남은 국물에 밥을 만다. 이때는 밥도 충분히 식었고 뚝배기 안의 국물도 많이 식어있는 상태라 빠르게 먹을 수 있다. 김치와 밑반찬을 함께 곁들여 먹어도 좋다.


이 전략으로 국밥을 먹었을 때, 나는 비로소 국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직장 내 '흡입러'들과 함께한 점심식사였지만 치밀한 전략의 승리였다. 다만 이 방법은 숙달되기까지 연습이 필요하다. 순서도 기억해야 하고, 이따금 상사분들의 말씀에 맞장구도 쳐드려야 하니깐.


음식이 나오자마자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동기에게 이 전략을 공유했다. 그녀는 이 전략으로 앞으로 추어탕을 꼭 다 먹겠다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명언 한마디를 남겼다.


"단순히 추어탕만 남는 것이 아니다.
추어탕 한 숟가락 속에 나의 미련과 아쉬움도 같이 남는 것이다."   by 이 OO


직장에서 '흡입러 직장상사'와 함께 식사하며 속도에 쫓기며 수도 없이 밥을 남겼을 또 다른 나의 동기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여러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드세요. 맛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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