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화이트 호스>
이 책에서 등장하는 화이트 호스는 '백마 탄 왕자님'을 연상시킨다. 이 시대엔 왕자님도 없고 백마 탄 남자도 없으니 요즘으로 치면 '벤츠 탄 능력남' 정도 되려나. '똥차 가고 벤츠 온다.'의 벤츠남.
어릴 적 난 공주가 되고 싶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공주님. 그들은 늘 시련을 겪는다. 그리고 그 시련의 결정적인 순간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다. 예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 그 옆에 백마 탄 왕자님의 투샷은 완벽해 보였다. 백마 탄 왕자님이 있어야 공주님은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네가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221쪽)
언제부터였을까. 공주의 시련이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한 이후에야 해결되는 이야기 구조에 의심을 품었다. 공주는 꼭 드레스를 입어야 할까, 꼭 예뻐야 할까, 그리고 그 옆엔 백마 탄 왕자님이 있어야 할까. 왕자님은 꼭 화이트 호스, 빛이 나는 백마를 타야 할까.
작가는 [화이트 호스 White Horse]라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동명의 노래에서 가져왔다고 소개했다. 유튜브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화이트 호스를 검색했다. 기타를 치며 라이브 하는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노래가 좋아요. 들어보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중략) 노래의 후렴구에서 익숙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화이트 호스. 나는 어렴풋하게, 어쩌면 내가 화이트 호스의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 이후를 계속 찾아다니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220쪽)
'너의 화이트 호스는 필요 없어.'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화이트 호스는 뭘까. 그럼 이 글을 쓴 강화길 작가의 화이트 호스는 뭘까. 그러다 나의 화이트 호스는 뭘까에 대해 고민했다. 적어도 화이트 호스를 백마 탄 왕자, 지금으로 치면 벤츠 탄 남자 정도로 정의 내릴 순 없다. 누군가의 존재 여부가 나의 본질 그러니까 화이트 호스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쓰는 사람, 그러니까 오직 뭔가를 만드는 사람만이 바꿔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 그런 화이트 호스."(217쪽)
나의 화이트 호스는 나의 오늘이어야 한다. 내가 쌓아 올린 생각들이어야 하고, 내가 보고 느낀 감상이어야 하고, 나의 감정이어야 하고, 내가 뱉은 말들, 그리고 내가 쓴 글이어야 한다. 나만의 무엇이 되는 것들이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평가는 물론 유의미하다. 나는 컵케이크를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10단짜리 대형 케이크로 생각해주면 고마울 일이다. 나는 10단짜리 대형 케이크라고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고작 컵케이크라고 생각한다면 그저 나만의 10단짜리 대형 케이크로 남겨두면 될 일이다. 내가 만들어낸 케이크의 크기를 그들의 생각대로 줄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화이트 호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꿨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10대의 너에게 화이트 호스가 그것이었다면 인정. 또 40대, 50대 아직 만나지 못한 너의 화이트 호스가 무엇이든 그것도 인정. 물론, 서른 지금 너의 화이트 호스도 무조건 인정!
당신만의 '화이트 호스'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