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_<홀>
'장.모.이.상'.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온 힘을 다해 적었다. 장모님이 이상하다. 나를 죽이려는 걸까. 장모님이 우리 집 마당에 엄청 큰 구멍을 판다. 깊고 큰 구덩이를.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아내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죽은 아내가 부러웠다. 나는 두 눈을 겨우 깜빡일 수 있을 뿐이다. 내 전신은 마비됐다. 이런 나에게 남은 가족은 오직 장모님 뿐이다. 장모님은 먼저 간 아내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도 나를 보살펴주신다. 유일한 나의 보호자다.
8개월 만에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장모님이 점점 이상하다. 나의 부서진 턱을 잡고 흔들며 화를 내기도 했고, 집에 불도 켜주지 않고 가버리거나 오줌통에 오줌이 흘러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기도 했다. 나를 수치스럽게 몰아세웠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28쪽
장모님은 자주 정원에 있었다. 아내의 옷을 입어서일까, 꼭 오래 전의 아내 같다. 장모님은 정원을 다 갈아엎고 있나 보다. 큰 구멍을 만드는 것 같았다.
사고가 나던 날, 차에서 아내는 최근 완성한 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라고 했다. 일찌감치 속물이 된 남자가 성공을 위해 어떻게 우연과 술수를 활용하는지, 그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또한 후배와 오랫동안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아내는 그 고발문을 나의 학교, 학회 및 동료들에게 발송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내는 뭐든 강박적으로 기록했다. 나의 귀가 시간도, 내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도. 그것들 사이에 나와 제이의 불륜도 적혀있을까. 장모님이 좀처럼 아내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아내의 메모들을 모두 살펴보았겠지. 아내처럼 나를 오해할 것이다. 나를 미워할 것이다. 나를 저 구멍에 묻으려는 걸까.
"장모 미상? 이상? 미싱? 뭐라고 쓰신 거예요?"
"아, 이상이오, 장모 이상, 어쩐지......"
물리치료사는 장모가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좀 이상했어요. 모르셨죠? 마당에요, 엄청 큰 구멍을 파고 계세요. 구덩이요. 엄청 큰데...."
기생충을 보고 나왔을 때 찝찝함을 떠올렸다. 사지가 마비된 채로 눈알을 굴리며 살 궁리를 하는 오기, 우아하고 예의 바른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장모 그리고 소름이 돋는 장모의 행동들, 아내의 복수심 그리고 증오.
처음엔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40대 남성으로 보였던 오기의 뒷면을 작가는 불편하고 짜임새 있게 들려준다. 그 불편함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책은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오기는 장모님이 큰 구멍을 파고 있고 아마 그 구덩이에 자신을 빠뜨릴 거라고 겁을 먹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다. 오기는 그동안 성실하게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는 것을.
이 소설이 무서운 것은 내용이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들어갈 무덤을 파며 살아간다. 오기를 비난할 수 있을까. 오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려고 손을 들다가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하기도, 내 주변을 향하기도 하는 것을 발견하고 더 오싹해진다.
다가오는 할로윈데이에 "사위를 죽이려고 구멍을 파는 장모의 이야기"만큼 유혹적인 이야기가 있을까.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편혜영 작가. 그가 만들어 놓은 늪에서 아내의 고발문을 읽으며 오싹함을 경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