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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Oct 19. 2020

관계에 대해, [씬짜오, 씬짜오.]

최은영 <쇼코의 미소>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데...."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독일에서 만난 두 가족이 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아빠들을 통해 베트남 가족과 한국 가족들이 인연이 됐다. 내가 아저씨 아들 투이와 같은 반이 된 걸 알고 우리 가족을 아저씨네로 초대하면서 가족들끼리의 관계를 쌓는다.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두 가족의 관계는 나의 엄마에게 더 각별했다. 투이의 엄마 그러니깐 응웬 아줌마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와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집을 오갔다.


어느 날 저녁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칭찬을 받아 볼 마음에 던진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두 가족의 관계가 무너진다.


"저희 형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형 나이 스물이었죠. 용병일 뿐이었어요." 아빠는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바닥을 보면서 말했다.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기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거동도 못하는 노인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요? 그건 그저 구역질 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응웬 아줌마가 말했다.




그 뒤로 엄마는 투이네 식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지만 서로의 연결되지 못한 단어들은 부서졌다. 엄마의 말을 듣는 아줌마는 지쳐 보였고 그저 그 시간을 견디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겨울 코트를 입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엄마는 아줌마를 찾아가지 않았다. 반쯤 쓴 립스틱과 파운데이션을 쓰레기통에 던졌고 벽만 보고 누워있었다. 그저 침묵했고 밥을 몰아 먹었고 손끝이 빨개지도록 뜨개질을 했다.


엄마에게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은 얼마나 소중했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다.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오래도록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우리 엄마가 드리래요." 아줌마에게는 엄마가 투이네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준 선물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엄마가 이번 가을부터 뜨기 시작한 목도리와, 털모자, 털장갑이 세 벌씩 들어있었다.


아줌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고 코를 훌쩍였다. 그녀가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커다란 갈색 눈에 작은 코, 울음을 참느라 아래로 내려간 입꼬리, 미간에 세로로 그어진 두 개의 주름.


"씬짜오, " 나는 아줌마의 작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씬짜오." 응웬 아줌마도 같은 말로 화답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90p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회복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때엔 피해자의 편에 서고 또 어느 때엔 가해자의 편에 선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라고 쉽게 내뱉다가도, 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안 나와 입이 안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엔 유독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관계에 서툰 사람이라고 한다.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자꾸 생각하다 보니 소설에 관계의 문제가 많이 등장한다고. 그는 "상대의 입장에서 오래 생각하고, 상대가 지나온 시간들을 어림해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한다고 말한다. 소설 곳곳 그의 신념이 묻어있다.


각자의 시간을 감히 판단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아픔을 으레 넘겨짚지 않는 것. 마땅히 사과하는 것. 그리고 나의 곁을 내어주는 것. 관계에 대해 조금 더 꼼꼼해지자.


* [이 단편이 대단하다]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 최은영 작가 인터뷰  http://naver.me/xZtwTi1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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