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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Oct 12. 2020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처음에 자리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보려 한다.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52p



"소피.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어?" 52p


안 좋은 감정들은 오직 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세계가 있다. 내가 사는 이 곳은 오로지 평온하다. 이 곳에는 갈등과 고난과 전쟁이 없다. 몸이 불편하고 얼굴에 흉측한 얼룩이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 그 결함을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다. 그 세계에선 모두가 행복하다. 하지만 행복의 근원은 알 수 없다. 서로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어린 시절 내내 아름다운 유토피아에서 살다가 성년이 되기 전 한번 지구에 온다. 지구는 내가 살던 세계와 달리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책에서만 배웠던 안 좋은 감정들을 모두 피부로 체감한다. 내가 가진 장애와 흉측한 얼룩을 보고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조롱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과연 지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끔찍한 지구에 남을까?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53p




유토피아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이 글을 쓰며 그런 질문을 거듭했다. 여전히 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계속 그 답을 찾아보고 싶다. 339p


유토피아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먹고 살 걱정 없는 세상, 나와 내 가족들의 건강. 시시하게도 자꾸 이런 것들만 떠올랐다. 세상에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 가능한 세상'이라니.  


진정한 유토피아란 신체적인 결함이 말끔하게 소거된 세상도, 그렇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을 격리해놓은 세상도 아닐지 모른다고. 오히려 장애와 더불어 차별을, 사랑과 더불어 배제를, 완벽함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붙잡고 고민하는 세상일지 모른다고. 어쩌면 폐기해야 할 것은 소수자들의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는 정상성 개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329p


정상과 비정상이 있는 곳. 정상이 아닌 비정상에 대해 그것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곳. 극복하지 못한 비정상에 대해 낙인을 찍고 혐오하는 곳. 그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지구다. 이 반대편에 있는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서로의 결점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사랑이 없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라서일까?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한다. 지구로 순례를 왔을 때 지구에는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때로 그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52p


차별 없는, 배제 없는 유토피아를 져버리고 끔찍한 지구에 남을 만큼 사랑은 숭고한 가치였던가. 소설 속에서 지구로 순례를 다녀온 절반 이상이 지구에 남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소설의 장르가 SF라기보다 로맨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54p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에 사랑을 뺄 수 있을까? 모든 안 좋은 감정들을 빼고 좋은 것만 담아 만드는 그 세계에 사랑을 감히 뺀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끔찍한 지구로 다시 돌아오려나.


2035년의 미래에 유전자를 디자인해서 모든 게 아름답고 결함 없는 '신인류'가 탄생된다고 해도, 그보다 100년이 더 흘러 그 신인류의 대열에 끼지 못해서 얼굴에 흉측한 얼룩이 있대도, 질병이 있대도, 팔 하나가 없다고 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 즉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더 발전된 '신인류'의 세계가 온다고 해도. 우리는 사랑이 있는 이 지구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려나.


차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없는 유토피아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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