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떼였다. 자기 일을 도우면 50만 원을 주겠다고 한 L에게서 수일 째 연락이 없다.
분명 큰 돈은 아니지만 사회초년생에게 적은 돈도 아니다. 몇 년을 알고 지냈고 같이 일을 했던 사람과 절교를 당할 만큼의 큰 돈은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그는 대학교 선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은 한 가수의 티저 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부족한 시간, 그보다 더 부족한 소스로 1분짜리 영상을 만들기란 보통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L에게 들어온 일이었으나 바쁜 관계로 나에게 부탁한 것이었고, 간곡한 부탁에 연민을 느껴 회사를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해보겠다고 수락한 것은 큰 실수였다.
야근을 마치고 또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채찍을 얻어 맞지만 일어날 순 없는 병든 소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일을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도닥이며 최선을 다했다. 끝나면 소고기를 구워먹자고 웃으며 이야기도 나눴다. 그리고 티저가 발표되는 아침. 영상을 본 나는 놀랐다.
내가 작업한 영상과 많이 달랐다. 아마도 L은 내가 한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대규모 수정 작업을 펼친 것 같았다. 어떤 피드백도 듣지 못한 채 작업을 진행해왔기에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때부터였다. L과 연락이 끊긴 건. 그의 SNS에는 '나는 정기적으로 인간관계에 가지를 친다'라는 주제의 짤막한 글이 쓰여져 있었고 '자 그럼 오늘의 가지치기 상대는 누구일까'라는 이죽거리는 듯한 말투로 끝이 났다.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책임자로서 결과물이 좋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한 마디 말도 들어보지 못한 채 연락이 끊기다니. 선후배로 만나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사이고자 했으나 한쪽의 일방적인 가지치기로 관계는 끝이 났다. 돈은 아무래도 좋다. 끝내 이유를 알지 못한 게 억울했다.
한동안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했다.
사람이 한 순간에 180도 변할 수 있을까. 그런 드라마적인 과한 설정은 믿고 싶지 않다.
극단적인 선택에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가 충분히 수집되어야 할 텐데 바로 그 점이 무섭다. L은 언제부터 준비를 했던 것일까. 그 근거가 된 나의 행동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이유도 모른 채 미움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것은 가능할까?
공교롭게도 한 달전부터 L과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오늘 회사 근처를 배회하다 팀원들과 웃으며 지나가는 L을 보았다. 3년 만인가. L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흘겨보다 나임을 눈치채고선 황급히 반대로 되돌렸다. 그것은 본능적인 회피였으리라.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속에 섞인 L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가위는 여전히 날이 시퍼런지 궁금했다.
L을 걱정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2015.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