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빨간 김치볶음밥
오늘은 발렌타인데이
길고 긴, 춥디추운 시카고에서도 슈퍼마켓이나 길거리 상점에 핑크빛 장식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면, 그래도 이제 한겨울의 중간 지점을 지나 봄을 향해 가고 있구나 싶어요.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딱히 특별한 행사가 없어 칙칙했던 도시에도 뭔가 설레는 분위기가 감돕니다.
발렌타인데이는 미국 유치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중요한 이벤트예요. 2주 전부터 담임 선생님과 룸맘(Room Mom: 선생님을 도와주는 학부모 대표)이 봉사할 학부모를 모집하고,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기부받는다는 이메일을 보내셨어요. 첫째 때는 회사 근무에 전혀 유연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 어려웠고, 그게 아쉽고 미안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1시간씩 연차를 쪼개서 쓸 수 있게 되면서, 연차를 아끼고 아껴두었다가 학교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고 하면 제일 먼저 손을 듭니다.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학교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이 훌쩍 커버린 첫째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집니다)
발렌타인 데이 선물은, 빨간 김치볶음밥 도시락!
둘째는 며칠 전부터 학교에 ‘김치’ 3통을 가져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담임 선생님이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하신다고 했다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김치만 덜렁 가져가는 건 좀 이상해 보여서 고민을 하던 차, 발렌타인데이에 봉사도 가기로 했으니 이왕이면 예쁜 한국식 도시락을 준비해 선물해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민 끝에, 크게 실패할 일 없고 발렌타인데이 분위기에도 어울리는 빨간 김치볶음밥과 달콤한 불고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요리를 잘하는 분들은 이 스트레스를 모를 거예요. 도시락 싸기 이틀 전부터 후회가 밀려왔어요. ‘나는 대체 요리도 잘 못하면서 왜 도시락을 싼다고 했을까…’ 유튜브에서 백종원 김치볶음밥 레시피를 검색해서 몇 번이나 돌려봤어요. 가장 중요한 건 신김치라고 해서 부랴부랴 마트에 가서 김치를 사서 밖에 꺼내 두고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포장이라도 예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퇴근길에 Trader Joe’s에 들러 선생님들께 드릴 핑크색 보냉백도 두 개 샀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을 만들고, 아이가 쓴 손카드와 초콜릿을 담아 도시락을 포장하니 그럴싸해 보였어요.
봉사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가니 선생님이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안아주셨어요. 원래도 허그를 좋아하시는 분인데, 김치볶음밥 도시락을 이렇게 반겨 주시니 한국 사람으로서 괜히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의 사랑을 모아주는, 마법의 발렌타인 메일 박스
아이들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선생님이 준비한 발렌타인데이 액티비티를 했어요. 하트 모양 쿠키에 아이싱과 스프링클로 장식하기, 쿠키 박스 색칠하기, 습자지로 하트 만들기 등등.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발렌타인데이 메일 박스에 친구들이 카드를 넣어주는 이벤트였지요.
처음에 이런 걸 준비하라고 했을 때는 ‘먹어서 좋지도 않을 사탕과 이름만 쓴 카드를 대체 왜 가져오라는 거지?’ 싶었어요. 하지만 오늘 보니 5살짜리 아이들이 반 친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하나씩 카드와 캔디를 친구 상자에 넣어 주고, “Thank you!”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따뜻한 추억이 될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서도 발렌타인데이 메일 박스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즐거워하겠구나 싶었죠.
발렌타인데이 행사는 아이들의 점심 시간이 끝나면서 마무리되었고, 저는 부랴부랴 짐을 싸서 회사로 출근했어요. 생전 안 해 본 선물 도시락을 싸느라 아침부터 신경을 팍 써서 그런지 너무 졸립니다. 다행히 다음 주 월요일은 미국의 President’s Day 공휴일이라 좀 더 여유 있는 주말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의 숙제 하나, 또 이렇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