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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Mar 29. 2017

산토리니 마지막 석양

2017. 3 그리스 산토리니 

그림 같은 멋진 장면을 기대하고 산토리니의 첫 아침 방문을 여는 순간, 저를 맞이한 건 바로 바람, 바람, 바람. 그래도 잠잠하고 고요해서 아늑함마저 느껴졌던 지난밤의 모습과는 달리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부는 산토리니 이아 마을은 CF에서 보던, 제가 상상하던 그 모습은 아니었어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비수기를 피해서 오는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저희는 이 날 북쪽 끝 이아 마을을 떠나 산토리니 남쪽 마을을 탐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산토리니는 섬 끝에서 끝까지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입니다. 바다를 끼고 초승달처럼 움푹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이 바로 보이죠. 저희가 묵는 곳은 산토리니의 북쪽 끝 이아마을인데 사실 이 곳은 대부분 관광지로 변해버려 현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아닙니다. 이 곳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피라 마을이라고 이 섬의 수도가 있는데, 대부분 이 곳에서 일상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술집, 카페, 병원, 은행 등을 가려면 바로 이 곳으로 모여야 하지요. 피라마을을 지나 10분 정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다시 외곽 지역이 펼쳐집니다. 이 곳에는 산토리니 흙으로 빚는 도자기 공방도 있고, 그리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들도 있습니다. 조랑말을 탈 수 있는 곳도 있고요. 마치 80년대 제주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산토리니는 제주처럼 화산섬입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화산 폭발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화산 활동을 한 곳이지요. 그래서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그리스 고대 유적지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에서 이 섬이 활화산 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아 마을이 아니더라도 하얀 벽, 파란 지붕을 볼 수 있는 마을들이 중간중간 있습니다. 대부분 이 마을은 서울의 해방촌처럼 언덕 형태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맨 꼭대기에는 성당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성당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주차를 하고 골목을 따라 올라갔는데 비수기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여름에 오면 이 지역에서는 로컬 주민들이 만드는 그리스 기념품이나 공예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네요. 

저 성당에 도착했을 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저 벽 색깔은 우리가 익히 생각했던 새하얀 색이 아니었어요. 연한 하늘색, 혹은 비둘기 색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보면 그냥 하얀색이 아니라 표백한 것처럼 새하얀 색이 나오는 건가 봐요. 

하루 종일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둘째 날, 대신 저희는 이아 마을 호텔에서 주인아주머니께 추천받은 해산물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어요. 아주 크고 이쁜 정원이 있는 식당이었는데, 그리스 지중해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에요. 이번 여행에서 오랫동안 기억이 날 식재료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올리브유. 대부분의 그리스 식당을 들어가면 빵이 나오는데 진하고 향기로운 연두색 올리브유를 듬뿍 찍어서 한 입 먹으면 '아, 여기가 바로 지중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행복감이 들지요. 이 식당에서도 정말 맛있는 올리브유를 맛볼 수 있었는데, 제 나름의 식당 평가 기준으로 '합격!'한 곳입니다. 그 날 들어온 싱싱한 생선을 웨이터가 보여주면 직접 골라 굽거나, 찌거나, 튀기거나 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식당의 특징은 지하에 아주 오래된 와인 동굴 창고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 여행 잡지에 빠지지 않고 소개가 되는 곳인데 이 곳 산토리니에서 만든 달콤한 와인도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원래 소믈리에에게 부탁을 하면 맛있는 와인도 맛볼 수 있고 고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날은 소믈리에가 아파서 쉰다고 해서 저희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지요. 지금도 산토리니 와인을 한 병 사 오지 못한 게 참 아쉽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 여행 중에 산 와인을 좋은 날 뜯어 마시는 게 정말 저희 부부의 큰 재미거든요. 

바람은 많이 불고 날씨도 흐렸지만, 어쨌든 이 날은 우리 산토리니 여행의 마지막 밤. 석양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저희는 산토리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다는 이아 마을의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그리스 엽서에서 자주 나오는 이 풍차가 있는 곳은 서쪽 끝에 있기 때문에 석양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지요.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시카고에서 온 저도 참 바람 피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옷으로 덮어 씌우고 바닷바람 코 앞에서 30분 넘게 바람을 피해 석양을 기다렸지요. 원래 전 이런 거 기다렸다 보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 물론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노고가 싹 가셨습니다. 석양에 비친 이아 마을은 정말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거든요. 

석양이 모두 지고 어둑어둑 해질 때쯤 저희는 다시 전망대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았어요. 바로 '아틀란티스 북스'이지요. 요즘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독립서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같기도 하고, 또 저 어릴 때 명륜동에 사시는 할아버지 댁 앞에 있던 인문사회 서점 '풀무질'을 닮기도 했어요. 이 곳은 산토리니를 여행하던 영국 출신의 3명의 친구가 이 섬 전체에 제대로 된 책방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곳에 문을 열게 되었지요. 포틀랜드의 대형 독립서점 파웰 북스처럼 이 책 서가에는 책들을 소개하는 주인장의 메모가 다 붙어 있어요. 왜 이 책을 소개하는지, 왜 읽어야 되는지 등이 쓰여있는 메모 말이지요. 


이아 마을의 다른 상점들은 비수기라고 모두 몇 달 동안 문을 닫았는데, 유일하게 이 곳만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어요. 책방을 구경만 하고 책을 사고 가는 손님은 없는지 서점 주인도 저희를 보는 둥 마는 둥 자기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지요. 여행은 가볍게 하는 걸 좋아하는 저라 무거운 책 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이지만, 왠지 이 곳에서는 책 한 권을 사 와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리스 요리책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책방 주인은 신나서 한 권 골라주었습니다. 책 맨 앞 장에는 이 곳에서 샀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틀란티스 서점' 도장을 하나 꽝 찍어주었습니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께 착한 아이 스티커 받은 기분이 들었지요. 



아직 활짝 개인 산토리니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한 저희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번에는 꼭 성수기에 와야지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어떤 광경이 저희에게 펼쳐질지 모르고요! 그렇게 저희의 산토리니 마지막 밤이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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