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 여행엔 지혜의 여신이 필요해

2017년 3월 그리스 아테네

by Silvermouse

산토리니에서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는 밤 비행기였습니다. 다행히 산토리니에서 마지막 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루를 충분히 즐기다 떠날 수 있었죠. 산토리니에서 아테네까지는 작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 정도면 갑니다. 이젠 제법 비행기 타는 게 익숙해진 윤서는 엄마, 아빠가 짐을 챙기면 어느샌가 달려가 자기 트렁크(빨간 M&M 가방)를 끌고 와 간식과 책을 챙깁니다. 차의 트렁크에 자기 짐이 실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을 하고 베이비 카시트에 올라타지요.


IMG_3576.JPG


산토리니는 완연한 봄이었는데 아테네는 아직 초봄이었습니다. 쌀쌀한 밤바람에 다시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지요. 다행히 저희가 묵기로 한 King George 호텔은 시내 중심인 시청 앞 광장에 자리 잡고 있어서 호텔에 짐을 풀고 주변 산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 아테네는 밤에 치안이 안전한 편입니다.


비수기라 그런지 운 좋게 방도 빨간 장미꽃이 있는 방으로 업그레이드받았습니다. 꼬마 손님이 왔다고 호텔 매니저분이 선물로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주셨습니다.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는 윤서는 연달아 몇 장을 그리더니 기분 좋게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나 봅니다.


IMG_3590.JPG
IMG_2512.JPG


다음 날 아침, 산토리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쨍한 해가 아테네 시내를 비쳐줬습니다. 3월의 그리스 낮은 해가 떠있는 곳은 덥지만, 곧 그늘로 들어가면 카디건을 입어야 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 딱 좋은 시기였지요. 호텔 바로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그 끝에는 시청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하루에 몇 번 수문장 교대식이 있습니다. 아주 큰 신발을 신은 경비병들이 슬로 모션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아이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그 신발을 닮은 은 목걸이를 사 오기도 했지요. 지금도 윤서는 그 목걸이를 하는 날마다 '아저씨, 아저씨'거리면서 그 아저씨들의 행진 모습을 아주 재밌게 따라 하기도 한답니다.


IMG_3675.JPG


이제 저희 부부는 윤서와 여행을 하는 것에도 지혜가 생겼습니다. 예전에 싱글로 여행 다닐 때는 하고 싶은 걸 100프로, 아니 120프로로 충족했다면, 부부로 둘이 다닐 때는 내가 원하는 것 50프로만 하는 것에 만족을 하고, 또 세 가족이 된 이후에는 기대했던 것의 10프로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가끔씩은 잠든 아이를 업고 무거운 짐을 끌어야 될 때 저 스스로 '하낫, 둘' 기합을 넣어야 될 정도로 힘이 부칠 때가 있지만, 그런 것들도 다 육아 여행의 추억입니다. 풍선 파는 아저씨를 발견하면 놓치지 않고 뛰어가서 윤서의 마음에 드는 풍선을 하나 골라 유모차에 달아주는 것도 육아 여행의 필수 지침 중 하나이지요.


IMG_3628.JPG
IMG_3625.JPG


앞서 얘기했듯이 육아 여행을 할 때는 많은 걸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괜히 애써 여행책을 사보거나 여행 블로그를 보거나 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괜히 뭐가 있는지 많이 알아봤자 다 가보지도 못할 것이고, 또 남들이 이미 다 가본 곳보다는 아이의 시선으로 그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테네에 도착한 첫날은 그렇게 호텔 주변을 천천히 산책하고 근처 공원도 한 바퀴 돌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더운 오후에는 길가다 트립어드바이저 깃발이 펄럭이는 젤라토 가게에 가서 색색가지 아이스크림을 앞에 종류별로 늘어놓고 세 식구가 사이좋게 나눠먹기도 하고요. (아이에게도 어른들처럼 여행 중에는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잖아요?)


IMG_3631.JPG


아이의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은 어느 날은 킹 조지 호텔 옆에 있는 SPG 자매 호텔인 그란데 브르타뉴 호텔(Grande Bretagne) 옥상에 있는 식당을 예약했습니다. 이 곳을 간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식당 밖으로 저 멀리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을 뒷 배경으로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서울의 남산 타워처럼 파르테논 신전도 밤이면 아름다운 조명을 켜놓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에 한창 그리스 신화를 읽고 푹 빠져 있을 때라 파르테논 신전을 앞에 두고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그 순간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IMG_2562.JPG


아이와 좋은 레스토랑을 가야 될 때는 이젠 스케치북과 색연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반 고흐가 아닌 이상 아이가 밥 먹는 내내 조용히 그림만 그려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와인 한 잔(혹은 한 모금) 할 정도의 여유는 주니까요. '내일은 저 파르테논 신전을 올라가 볼 수 있을까?'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또 아테네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IMG_3722.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