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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May 05. 2017

파르테논 신전에서 보낸 하루

2017.3 그리스 아테네

드디어 아크로폴리스에 가기로 한 날이 밝았습니다. 마침 날씨가 아주 좋은 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이와 여행을 할 때 비가 오는 날은 그냥 호텔에서 쉬기 딱 좋은 날이거든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파르테논 신전을 가리키며 윤서에게 알려줬습니다. '우리가 오늘 저 산 위에 올라갈 거야. 저 위는 신들이 사는 곳이지!'



아무래도 아크로폴리스는 신화나 역사를 아는 만큼 보일 듯하여 투어를 예약했습니다. 제가 유럽에 갈 때마다 애용하는 유로 자전거 나라 프로그램 말이지요. 하지만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허둥지둥하느라 만나기로 한 투어 그룹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그냥 그 날 하루 예약금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구경을 하기로 했지요. 그리고 그게 이번 아테네 여행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에는 유모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입구에서 맡기고 가야 합니다. 저희 같은 가족들이 많았는지 유모차 주차장엔 아침 일찍부터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의 유모차들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유모차가 없어도 아크로폴리스까지는 완만한 언덕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아이와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돌 몇 계단을 오르고 바위틈에 펴있는 노란 꽃을 한참 가지고 놀고, 지나가는 개미가 사라질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아크로폴리스에 사는 개미 구경을 해야 됐지만, 그래도 아이는 지치지 않고 재밌게 올랐습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

 

저와 남편은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유네스코 문화유산 1호를 드디어 코 앞에서 볼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습니다. 물론 지금 아크로폴리스는 수 십 년째 복원 공사를 하고 있어서 어느 쪽에서 찍든 크레인이 사진 앵글에 걸렸지만, 그래도 수 천 년 전의 건물이 세월을 흘러 흘러 지금 제 눈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감동이었지요. 마치 한 이름 모를 유럽의 성당 안에서처럼 저희는 한참을 그 파르테논 신전을 쳐다보았지요. 바깥세상의 시간과 단절되어 시간이 흐르는지 멈췄는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처럼요. 하지만 아직 그런 역사 교과서를 봤을 리 없는 두 살 윤서는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그 앞에 핀 들꽃을 따서 장난감 통에 담으며 한참을 놀았습니다. 나중에 윤서가 놀았던 저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신전이라는 걸 윤서는 알게 될까요?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전이니만큼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 오르면 아테네 도시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타워 정도가 되려나요. 그리스 사람들도 저처럼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우리 동네 어딨나 찾는 걸 좋아할까요?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디오니소스 극장에서였지요. 대충 눈치로 앞의 몇 줄에는 사람 이름, 혹은 직함이 적혀 있는 곳은 한눈에 VIP 석이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자리들보다 훨씬 크고 등받이도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좌석이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역시나 그 귀빈석은 그 당시 고위 정치인, 외교 사절 등을 위한 자리였다고 하네요. 올라갔으면 올라갈수록 남들과 다른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흘러왔나 봅니다. 


디오니소스 극장
디오니소스 극장의 VIP 석


사실 전 역사 이야기나 유적지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런 곳을 오더라도 처음에만 '우와'하지, 휙 한 번 돌아보고 젤라토를 먹으러 재빨리 내려가거나, 인증숏 하나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그런 부류의 불량 관광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윤서를 데리고 여행을 하면서 전 새로운 여행의 재미를 알게 되었어요. 바로 아이의 시선으로 여행을 하는 방법이지요. 아이는 제가 보지 못한 의자 밑에 글씨를 발견해서 저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나 하면, 신전 앞의 풀밭에서 혼자 한참을 놀아준 덕분에 제가 파르테논 신전을 오랫동안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죠. 후다닥 내려가서 먹는 젤라토 대신에 전망대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맞으며 싸온 과일을 사이좋게 나눠먹는 즐거움 또한 알게 해주었고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예약했던 투어 프로그램에서 한두 시간 정도 돌아보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크로폴리스에서 저희는 장장 그 두 배가 넘는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오후엔 호텔로 들어가 셋이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실컷 낮잠을 잤지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떠느라 세명 모두 지쳐있었거든요. 한참을 꿈나라에 갔다가 나란히 돌아온 시간은 창 밖의 아테네가 어둑어둑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침에 원래 따라가기로 했던 투어는 여전히 진행 중인 시간이었습니다. 저녁 8시에 끝나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어휴, 저희가 유모차를 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투어 그룹을 따라다녔다면 얼마나 지쳤을까요. 남편과 저는 아침에 지각하기를 참 잘했다고 얘기했습니다. 


다녀와서 아크로폴리스에서 찍은 사진을 윤서 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이제는 그곳이 역사 교과서 속 그림 같지만은 않아요. 저희 가족들이 꽃을 따서 한참을 놀던 곳이고, 간식을 나누어먹던 곳이고, 개미를 찾아다니던 곳이니까요. 그렇게 세계문화유산 1호 그곳에 우리 가족의 추억을 남겨두고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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