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어머니의 혼을 달래기 위한 굿에 쓴 50만 원은 제가 어머니께 해드린 전부였습니다. 돌아가시고 생각해보니 해드린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주방에는 많은 것이 늦게 등장했습니다. 86년 아시안 게임이 한창일 때, 저희 집에는 가스레인지가 없었습니다. 성냥불로 곤로에 불을 피워 계란 프라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응원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서야 세탁기로 빨래를 하셨던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셨습니다.
그 때문인지 저는 자가용을 사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순순히 응해 드렸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아버지는 해마다 자가용을 사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못 사셨습니다. 대신 트럭을 사셨습니다. 그 트럭으로 저를 학교에 태워다 주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학교 후문 쪽에 내려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게 기름값이 적게 나온다며 우겨댔지만 사실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자랑하듯 말씀하셨습니다. 기특하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설마 제 거짓말을 모르셨을까요?
제가 아버지께 사드린 자동차는 조건부였습니다. 사업상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 사업이 잘 안되면 차도 필요 없으니 다시 처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단계인지, 다단계 비슷한 것인지 그 사업은 잘 안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차를 팔았습니다. 차를 팔고 남은 돈이 천만 원이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주기로 했던 그 돈을 아버지가 급하게 쓰시고 절반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집이 시끄러웠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은 이종 친척에게도 마음이 쏠리게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학원을 하던 이종사촌 형은 잠시 힘들어서 그러니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누구보다 슬퍼했던 이모의 아들이자 영원한 ‘모범 학생’으로 제 머릿속에 각인된 형이었습니다. 형의 간곡한 부탁에 저는 저의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천 만원을 형에게 보냈습니다. 이 일로도 집이 시끄러웠습니다.
정 때문에 저는 현명하지 못했을까요? 흔히 가난에도 다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가난을 잡고 또 잡은 것이 아닐까요? 어머니의 관을 닫는 순간 저승길 노자돈을 넣으라는 장례사의 말에 삼촌들은 수 십 만원을 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다들 어려운 형편에…, 우리는 가난을 보내기는커녕 붙잡았습니다. 세상을 좀 더 살면서, 더 큰 일들을 겪으면서, 저는 이런 순간마저 메마른 가슴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언제가 서울역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중년 남성분이 제게 말을 거셨습니다.
“부산까지 갈 차비가 없는데, 5만 원만 좀 빌려 주십시오.”
말끔한 정장을 입으셨던 그분의 표정과 말투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난감한 경우도 있지 않냐며, 본인의 명함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계좌 번호 적어 주시면 잊지 않고 내일 꼭 갚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필 그때 왜 그분의 얼굴에서 제 아버지의 얼굴이 아른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음 날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OOO 씨 좀 부탁합니다.”
젊은 남자분이 받으셨는데 다짜고짜 짜증을 내시더군요.
“혹시, 돈 빌려 주셨어요?”
“네…”
그다음 말에 모든 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전화가 너무 많이 와요.”
저는 왜 이렇게 바보 같고 답답한 성격을 가진 것일까요? 제 가슴은 계속 메말라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