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 황망한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정확히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공문 편지로 그 사건의 시작을 알 수 있었을 뿐입니다.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밤늦은 시간까지 TIME 지를 읽고 있었는데, 그러던 새벽 2시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새벽 2시에 편지를 개봉하셨을까요? 짐작은 갔습니다.
어머니는 동해 바다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주검을 발견한 어선이 해양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발견 당시 어머니는 사망 후 한 주 정도 지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 정도 더 지난 그 밤에서야 연락이 되어 저는 원주에서 서울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강릉으로 갔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경찰이 시신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부패가 많이 진행된 어머니를 저는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혈액 검사 결과 알코올 수치가 높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경찰은 가족을 대상으로 어머니 앞으로 보험금이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슬픔은 늦봄의 장맛비처럼 몰려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울었습니다. 거친 시멘트 가루가 얼굴에 상처를 냈습니다. 아내도 울었습니다. 아내에게 업힌 아기도 울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둘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누나가 왔습니다. 가출했던 누나가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가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울산에서 이모가 도착했습니다. 이모는 엄마의 하나뿐인 친언니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이종사촌 형의 엄마였습니다. 이모는 장례식장에 들린 후 근처 고향 친구네 집으로 가셨고 거기서 드러누우셨습니다. 이종사촌 형은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전화를 남겼습니다. 일 때문에 못 가서 미안하다 했습니다.
이모는 엄마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 굿을 해야 하니 50만 원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걸 믿거나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냥 드렸습니다. 따질만한 상황도, 금액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화를 냈습니다. 사전에 의논을 안 해서였을까요? 저도 화를 냈습니다. 아내는 화를 더 키웠습니다.
“어떻게 손녀를 남겨두고 돌아가실 수가 있어!”
마지막 날 새벽에 운이가 왔습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운이 어머니가 그러셨답니다. 그럴수록 더 가봐야 한다고. 운이는 알리지도 않은 악상에 알아서 찾아온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운이랑은 여러 추억이 있지만 제 어머니의 장례식을 찾아준 기억이 제일입니다.
속초의 한 낡은 화장터. 지금은 없어져버린 그 화장터를 우연히 영화 <파이란>에서 봤을 때 얼마나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화장터에서 어머니는 연기가 되어 스러졌습니다. 불을 붙이면서, 화장터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저는 외쳤습니다.
“엄마, 불이 뜨거워요. 빨리 나오세요!”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고 저는 어딘가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시체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주검을 끌어안을 수 없었다. 분명히 나의 어머니인데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다시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게 한 가지 확신이 있다. 어머니라면 내 시체를 백만 번이고 품에 안았을 것이다. 어머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