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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Aug 17. 2017

20. 씨밀락, 쇼콜라, 부족한 부정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토요일 업무를 마치고 원주역으로 가는 길은 정말 맘이 가벼웠습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저는 기차에서 늘 잠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얼마나 피곤했던지 흘러내려간 양말 사이로 드러난 맨 살이 기차 히터에 데어 화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도착한 서울의 매캐한 공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도착한 처갓집에서 빨래는 알아서 했을지언정 제 육아 점수는 빵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좀 무기력했습니다. 주중에 제가 원주에 있는 동안 아기는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형님과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빠는 4순위였지요. 제가 집 근처의 골목길에 들어서면 빨래 줄을 겹겹이 포개서 네 발 자전거에 묶어 아기를 끌어 주는 형님의 모습이 보이곤 했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형님과 아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습니다. 둘은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골목길, 저와 아기 사이엔 공기마저 없었습니다. 아빠가 얼마나 못했으면 아기는 삼촌을 더 따랐을까요?  


아기를 위한 저의 노력은 거버, 오일릴리 같은 이유식이나 유아 브랜드에 익숙해지는 낮은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해외 직구’라는 것이 생소한 시절에 남들은 미국 PX를 통해서라도 미제 분유 씨밀락을 구입했습니다. TV 뉴스에 나올 정도였으니, 그만큼 대중화가 되었다는 것이었을까요? 그 보편적 정성을 극성이라고 치부하는 제 태도는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기 일쑤였습니다. 동네 파리 바케트에서 다 팔려버린 가또 쇼콜라 (Gateau au Chololat) 케이크를 찾아서 서울시내를 뒤지면서 저는 어디까지가 정성이고 어디까지가 극성인지 혼자 고민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결론을 내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냉장고에 요거트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몇 개 있길래 하나 먹었는데 아내는 따지듯 내뱉었습니다.  

“아기 걸 왜 먹어?”   

부족하면 또 사면되지 않냐는 제 변명은 아내의 짜증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냥 꼴 보기가 싫은 상태, 딱 그 상태였지요. 그런데, 다음 날 아내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제게 요거트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거는 먹어도 돼. 유효기간이 지난 거니까.”    




이런저런 갈등을 해소할 시간의 부재.     


일요일 저녁이 되면 저는 다시 원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은하철도 999’도 아닌데, 서울을 떠나는 기차는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안드로메다로 가져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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