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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Dec 05. 2018

32. 이메일, 보고서, 거북목 증후군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읽지 않은 이메일이 수십 통을 넘어서 수백 통을 넘기는 것은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습니다. 수신인 외에 참조인은 왜 그렇게 많은지…. 결국 나보고 어떻게든 처리하라는 말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메일들은 종종 사내 메신저와 함께 날아왔습니다. 메신저는 거의 ‘메일 보냈다’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역시 나보고 어떻게든 처리하라는 말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멘트였습니다.


열어보지 않은 이메일은 꼭 결정적인 때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메일은 업무의 책임 소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화로 연락할 때는 통화가 안되면 서로가 책임을 나누거나 그래도 전화를 거는 쪽에 좀 더 무게를 지웠는데, 이메일은 100% 받는 쪽에다가 책임을 지웠습니다. 게다가 회의 시작 바로 전에 메일을 보내 놓고서는 막상 회의 중에 ‘메일 보냈다’는 한 마디로 후배를 몰아붙이는 선배는 무능을 넘어 인성이 의심되었습니다.


모든 회의의 큰 뼈대는 해당 연도의 경영계획이었습니다. 경영계획은 일반적으로 버전이 3개였는데, 경영계획이 있고, 목표를 더 높게 잡은 도전계획이 있고, 그리고 매달 새롭게 목표를 수정해서 잡은 실행계획이 있었습니다. 월말이 되어 실적 악화가 예상되면 대책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대책 보고서도 버전이 많았습니다. 각종 분석은 ‘경영 계획 대비…, 도전 계획 대비…, 실행 계획 대비…,’ 등으로 버전이 늘어났고, 신규 수립 대책은 ‘best, normal, worst’로 다시 세분화되었습니다. 각종 아이템이 취합되어 그렇게 엑셀 파일의 시트가 수십 개가 되면 엑셀이 무거워지는 느낌, 노트북이 버거워하는 느낌,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혹시나 파일이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머릿속을 멍하니 채웠습니다.


최종 보고서는 워드로 작성했기에 주요 숫자와 표는 다시 엑셀에서 워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때 각종 표와 테이블, 혹은 숫자의 위치나 소수점 등을 깔끔하게 정렬시키기 위해서 ‘Copy & Paste’를 하지 말고 주요 엑셀 테이블의 숫자를 워드에 일일이 쳐 넣으라는 오더가 떨어지면…,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거북목이 되어서….


그렇게 보고서가 준비되고 ‘숫자’가 확정되면 마감을 며칠 앞두고 전국의 주요 공단에 산재한 고객사를 방문해서 사정사정을 해야 했습니다. 구매처에서는 당월 구매 비용을 줄여야 하고, 판매처에서는 당월 판매 실적을 높여야 하니, 서로가 사정이 뻔한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일 날 입고시키지 말고 월초에 입고시키세요’라는 구매 담당자의 말은 무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당월 실적 달성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상무님은 사무실이 떠나갈 듯 소리치곤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역성장은 안 된다고. 그래프는 무조건 '우상향'이어야 한다고.


승용차를 타고 편도 한 시간, 길게는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거래선 방문길은 그나마 마음이 편했습니다. 어디서든 전화가 오면, ‘거래선 가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러면 운전 중에 계절을 보는 여유도 생기고, 무엇이 그렇게 사무쳤는지 끝내 종이에 끄적거리게 된 시상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4월은 꽃내음이 가득한 시간입니다.

개나리, 벚꽃, 백목련 등을 마주하면

우리 마음도 밝아지고

한껏 포근해집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얼마나 빠른지

벌써 민소매가 편해집니다.

가벼운 옷차림에 도심을 벗어나 보면

과수원의 배꽃은 절정을 이루고

한 줄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눈을 감기 우는 배꽃의 밝음에

가을 열매의 달콤함이

비강에 스미는 듯하고

바람이 길어 꽃잎이 날리면

하얀 흙 길 걸음걸음이

첫눈 밟듯 합니다.


늦 봄 배꽃으로

계절의 수레바퀴를 돌려보니

내 생은 어디쯤에 있는지

나는 무슨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는지

멈칫,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한

지적 설계자의 예지와 손길이

간절한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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