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서류상으로 유학생은 아내였습니다. 아이들은 유학생의 자녀였고요. 그러면 아이들이 미국의 공립학교를 무료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유학과 관련된 사람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멀리 신라시대 최치원부터 <7막 7장>의 홍정욱, 유학파 디자이너였던 신이, 최근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로 간 홍이 등.
대학에서 영어로 진행되었던 경영학 수업도 떠올랐습니다. 제 말문을 막아버린 수업들이었습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다 온 바이링구얼(bilingual) 학생들의 긴 말들을, 그나마 1~2년 어학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의 짧은 말들을, 그 소리들을 저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틈에서 눈치껏 버벅거리며, 저는 출석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느 영화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친구가 낙제를 하면 눈물이 나고, 일등을 하면 피눈물이 난다.’
회사도 비슷했습니다. 해외 출신 박사들이 영입되면 국내 박사들은 연구직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들이 영업직으로 옮겨오면 이른바 ‘기술 영업’이 가능해졌고, 저처럼 경영대나 기타 문과 출신의 일반 영업사원들의 입지는 좁아졌습니다. 정말 ‘문송’ 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유학 준비를 도왔습니다.
아내는 학생 기록과 상장 등의 서류 번역을 제게 시켰습니다. 유학원에 맡기면 그게 다 돈이었으니까요. 우리 어렸을 때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아이들 관련 기록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아내의 서류를 꾸역꾸역 번역해서 유학원에 제출했습니다.
아내가 말하길 자기는 운이 좋았답니다. 잘 준비해도 비자가 거절되거나 1년짜리가 많이 나오는데 5년짜리가 나왔습니다. 미국이 안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등으로 유학 국가가 하나씩 밀려지는 순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제출한 재직증명서와 납세 서류 덕택이라고 넌지시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살 집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아내 친구의 도움으로 구했습니다. 아이의 조기 유학으로 3년째 미국에 거주 중인 그 친구가 뉴욕, 시카고, 그다음으로 선택한 지역이 솔트레이크 시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솔트레이크 시티는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깨끗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미국으로 가기 전에 예술의 전당이 있는 서초로 가서 첫째에게 4/4 사이즈 바이올린을 사주었습니다. 이전 바이올린은 누가 버린 것을 수리한 것이었는데, 이 바이올린은 제 월급보다 비싼 것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3개월 할부로 계산을 했습니다. 아빠가 돈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보인 것이 아닐까 맘이 불편했습니다.
1월. 추운 겨울에 아내와 아이들은 미국으로 갔고 저는 남일인 듯 뉴스에서나 듣던 기러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갈 형편이 되면 독수리 아빠였고, 아예 갈 형편이 못되면 펭귄 아빠라고 하더군요.
일 년에 한 번, 저는 휴가를 내어 미국으로 갔습니다. 2년 차 여름, 우리는 유타를 출발해서 애리조나와 네바다를 여행했습니다. 163번 국도에서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콜로라도 파웰 호수에서 제트 스키도 타고, 그랜드 캐년의 호피 포인트(Hopi Point)에서 일몰도 구경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