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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May 06. 2019

34. 유치원, 초등학교, 조기 유학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어느 날 하루는 오전 반차를 내고 아이를 등교시켜 주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갈색 체크 무니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등에 매고, 실내화 가방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걸어갔습니다. 종아리 높게 올라간 흰 양말과 검은 구두가 단정했습니다. 옆에서 제가 졸졸 따라가는 모양새였습니다. 맘이 먹먹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보내면서 갈등이 많았던 학교였습니다. 추첨을 해서 어렵게 들어가기도 했지만, 학비를 어떻게 댈지도 막막했습니다. 아내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잘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공립 초등학교와 사립 초등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 학교나 저 학교나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얼굴도 그랬습니다. 다들 ‘재잘재잘…’ 똑같았습니다. 학교 교문에 이르러서야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사복을 입은 아이들이 매스게임을 하듯 갈라졌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냥 집에서 가까운 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이제는 아닌가 봅니다. 초등학교도, 초등학교 때 같이 다니는 학원도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워킹맘인 허대리는 자기 월급은 모두 아이들의 영어 유치원에 쏟아붓는다고 했습니다. 매달 백만 원이 넘어가는 돈이지만 강남의 절반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아이가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 교실문에는 담임 선생님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정, 부’ 이렇게 두 분이셨고, ‘부’ 선생님은 미국인이었습니다. 저는 놀랬습니다. 요즘 ‘이 정도인가?’ 싶기도 했고 제가 몰라도 너무 모르고, 뒤쳐져도 너무 뒤처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맘이 불편하면서도 오싹해졌습니다.

 



둘째가 유치원에 저를 초대했던 날, 아이는 저에게 다도를 가르쳤습니다. 병풍으로 둘러 쌓인 교실은 찻상과 비단 방석으로 동양미가 물씬 풍겼고, 손을 씻을 넓고 커다란 도자기 그릇과 곱게 포개진 두툼한 수건이 다기와 같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안동 양반 잔칫날 상차림처럼 한 사람에 앞에 한 상 이었습니다. 다도는 자녀가 부모에게 큰 절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생님들이 다 함께 절하는 모습에 하늘에서 학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차를 마시기에 앞서 손의 바닥과 등을 맑은 물에 담그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라고 다짐을 하세요. 

이러한 몸과 마음의 씻음이 선행된 이후 차를 마주하세요. 

공손한 마음을 담아 두 손으로 다기를 잡고 

영혼의 고양됨을 바라듯 높은 곳에서 

맑은 소리를 내리며 차를 따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정결함을 성취하고, 

마지막 방울의 떨어짐과 동시에 

여분의 울림과 흐름을 찰나에 거두어들임으로써 

절제의 미학을 본받습니다. 

깨끗한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손길로 번져오는 차의 기운을 느껴보고, 

물결이 그려내는 빛의 섭리를 눈동자에 담아봅니다. 

이제 비강에 스미는 향기로움과 함께 한 모금 머금어 보세요.” 


제가 한 모금 삼키자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두 손으로 공손히 주전부리 하나를 제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이렇게 준비를 잘했는지….


아내가 답을 해주었습니다.

“좋은 유치원이라서 그래. 그래서 좋은 유치원에 보내는 거야.”


그 유치원비에 대해서도 아내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잘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었습니다. <달과 6펜스>의 한 구절처럼 아내는 꿈을 가계부에 적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후 아내는 아이들의 조기 유학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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