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세이
글로벌 시대의 업무 문화 변화
내가 일하는 상품개발팀 내부 협업은 다기능적이어서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한국 대기업의 전형적인 팀 구조와는 다른 형식이다. 한국의 대기업은 전통적으로 한 직군이 하나의 팀을 구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장과 글로벌 업무 문화, 특히 실리콘밸리의 영향으로 업무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개인의 역량과 기여도가 팀의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는 지식 공유와 활용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별적 지식의 중요성
이러한 변화는 연장자에게 내려받거나 팀이 제공하는 기존의 지식보다 개인이 직접 체득한 경험적 지식이 업무 수행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게 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팀 전체적인 성과의 평가가 아닌 개인 평가가 더 중요해지면서, 팀원들 사이에서 개별적 지식의 추구는 경쟁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을 눈앞에 두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는 마치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처럼, 나이나 경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각자의 현재 능력만으로 판단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식이나 미래의 잠재적 능력이 아닌, 현재 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식과 능력의 가치이다. 지식노동에서도 분업화된 현대 산업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알고 있는 과거에 유용했거나 미래에 유용할 지식들을 한꺼번에 사용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다만 다양한 지식을 통해 융합적 사고를 할 뿐이다.) 당장 상반기의 평가를 잘 받기 위한 단기 목표와 문제의 해결이 더 중요 해진 것이다. 아무도 직원이 5년이나 10년 뒤에 성과를 발휘하도록 지원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제 직원들은 당장 내년이라도 이직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식 축적 방식의 차이
전통적인 동양의, 위에서 아래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은 다양한 많은 사례를 통해 얻어진 지혜 (인사이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특정 상황에 그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신 그것을 응용하여 다양한 상황에서도 진리가 되는 원칙들인 경우가 많아 과거의 상황에 적합했던 지식이 현재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는 적용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반면, 서양의 지식 축적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의 경험에 의해 각자에게 이루어진다. 이런 지식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기 주도적 학습을 촉진하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포용적이진 않지만 다양해질 수 있다. 양적으로는 실패로 끝나는 지식이 많이 발생하지만 마치 야생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개체가 매우 강한 유전자를 후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지식의 세계에서는 양적 생산보다 다양성이 더 중요하고 몇몇 살아남은 강력한 지식을 복제하여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전략일 수 있다.
창의성에 영향을 미치는 학습법
동양과 서양의 학습 방식 간의 차이는, 개인의 창의력 발휘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양의 교육 시스템은 미래를 위해 다양한 지식을 수집하고 저장하여 숙성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의 교육 방식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지식을 수집하고 활용하는데 더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서양식 교육방식은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창의성의 과정 중에 악조건과 실패가 돌연변이를 만들고 그 돌연변이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위에서 내려받지 않는 서양식 교육에서는 문제해결을 위해 필요한 지식영역의 많은 영역이 비어있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임기응변으로 채우는 식이 된다. 물려받은 프로세스도 없으므로 각자의 방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이전 기록이나 소속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전체를 매번 새로이 경쟁시키는 한국 양궁의 국가대표 선발 방식과도 같다.
동양적 방식으로 그림 배우기
이런 방식의 차이는 그림을 배울 때도 적용되었다. 입시 미술을 하며 석고상을 그리는 연습을 할 때였다. 내가 배운 방식은 석고상의 외곽의 형태, 비례등 전체적인 구조와 대략적인 명암에서부터 시작해 나간다. 이때 나타나는 그림은 우리가 마치 눈을 희미하게 뜨고 사물을 바라볼 때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다가 점차 구체적인 형태와 디테일을 전체적으로 골고루 완성해 간다. 최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도 완성된 부분이 없는 것이다. 반면 석고상의 눈부터 그리는 친구도 있다. 석고상의 눈과 코를 먼저 완성하고 귀와 턱으로 옮겨가며 그리는 친구는 그리다가 많은 문제점에 부닫힌다. 턱과 귀가 너무 가까이 그려진다던가, 화폭의 한쪽에 석고상 어깨가 다 들어가지 않아 잘린다던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그리는 친구는 여지없이 꾸지람을 들었다. 알고보면 피카소가 이렇게 그렸던것 같다.
이런 방식은 건물을 지을 때 지을 건물의 전체 설계도가 있고 거기에 맞게 비계를 세운 후 정해진대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설계도에 없는 게 만들어질 수는 없다. ( 그럼에도 순살 아파트를 만드는 한국인의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서양적 방식으로 무술 배우기
서양인에게 일본식 합기도를 배운적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처럼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단독으로는 격투 시 마무짝에 쓸데없는 기본 동작(후방 낙법 같은)을 하루에 백번씩 해서 몸에 베게 한 후에 그것들을 연결하는 동작(대련에 써먹을 수 있는)을 몇 달 후에 가르쳐 줄 것이라 기대했다. 무술영화에 나오는 물 길어 나르기, 손날단련 같은 개념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서양인 사범은 특정한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첫날부터 하나의 완성된 동작(대련에 쓸 수 있는)을 매일 한 두 개씩 가르쳐 주었다. 기초 체력이나 기본 동작은 개인이 알아서 키우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어느 한 동작도 사범이 시범을 보이기 전에는 혼자 외워서 할 수가 없었다. 나의 학습법이 교수법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위계적 지식으로 배우는 한국식 학습법은 당장은 쓸 모 없지만 그것들이 다 모아지는 어느 지점을 미리 머리에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방식이다. 매우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참고 견디며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경쟁적 지식을 추구하는 서양의 학습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하되 완결된 작은 경험들을 통해 앞으로 나가게 한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니 목표하는 미래의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한국과 서양의 학습법 사이의 차이는 창의성과 아이디어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어느 한쪽만이 필요하는 게 아니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이해하고 협력을 할 수 있을 때 정말 집단 창의성의 나오는 게 아닐까 한다. 위계적 지식과 경쟁적 지식 사이의 이러한 균형은 창조적인 환경에서 혁신과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학습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은 더 넓은 시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키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