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이야기
나는 스물일곱 나이에서 멈춰있다.
그 정도나이이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1, 2년 정도 다닌 정도가 되는데, 사회 초년생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성장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 이후로 살면서 나에게 변화란, 마치 나의 본모습 위에 옷을 하나씩 껴입는 것과 같고, 사람들은 나와하는 대화, 내가 하는 행동, 표정과 같은 겉모습을 나로 인식하고 있다. 스물일곱 이후의 나는, 일하면서 배운 지식, 기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익힌 대화법, 사회적 규칙, 위기 대처 요령 등 중급자용 세상 사용법과 같은 일종의 추가 정보를 축적하고 있지, 본질적인 내가 더 성장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나'라는 자아도 일종의 정보에 불과하다. 영혼이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영, 유아기를 거치며 신체와 세상의 경계지점의 자극을 인식하면서 그 경계점 안쪽의 것을 통제가능한 '나'로 인식하고 자아를 분리 성장 시킨다.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생기는 기억과 규칙들이 나의 내적 모습을 형성하고 드디어 그런 나의 모습을 제삼자 관점에서 완전히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서른 즈음이 아닌가 싶다.
그즈음부터 나의 본모습은 바뀌지 않은 채 나는 밖같세상으로 여행을 떠나 정보를 모으고 세상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나의 모습을 꾸며오고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 가족, 자녀, 경력, 동료, 자산, 지위, 명예, 지혜와 같은 '확장된 나'를 성장시켜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진정한 나'는 스물일곱에 멈춰있게 된 것이다. 김광석도 서른즈음부터 그런 순수한 자신으로부터 하루하루 멀어져 감을 노래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미 내가 그 중심에 들어선 40에서 60세 단계는 이렇게 '확장된 나'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일 것이다. 세상의 에너지와 자원은 한정이 되어 있고 그것은 나 이후에 세상에 올 영혼들이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확장된 나를 내려놓고 본질적 나로 돌아와야 한다. 언제 즈음이 좋을까? 그런 것들을 끝까지 잡고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다가는 80세, 90세 정상에서 갑자기 급하강하는 절벽을 만날 것이므로 하산을 시작하기 적절한 시기는 55세부터 즈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안전하게 서서히 사회적 껍질을 하나씩 벗으며 가벼운 몸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때부터 '나'를 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게 해 주었던 신체도 다음 세대를 위한 자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하나씩 동작을 멈추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때가 자아실현을 할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의 인정을 받고, 자녀를 확장된 나로 보던 시기를 끝내고 진정한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시기이다. 하산을 시작하면서부터 부모, 친척,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 떠나기 시작한다. 지금의 사회적 나를 이루고 있던 껍질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그것들을 위해 수집했던 정보, 기억들도 사라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를 보면 욕구피라미드의 정점에 자아실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아실현의 단계로만 올라갈 생각을 한다. 아마도 누구도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올라갔던 것보다 더 조심히 아래로 내려와야 하다. 위에서 뛰어내리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정점에 다 와 가니, 어떻게 안전하게 내려올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신체는 우리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야 한다고 신호를 보낸다. 대부분의 자아실현은 최종적으로는 신체의 능력의 도움보다는 정신적 능력에 도움에 의지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정신적 기능으로 돌리고 신체는 재생을 멈추고 해체를 시작한다. 조금 더 지나면 정신적 부분에서도 이제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구축한 지혜들만 남기고 정보를 모으고 유지했던 기억 부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난 이 단계가 벌써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게 그 징조이다. 사람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사회적 껍질을 하나씩 벗어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70대에 이르면, 지위, 인정, 명예와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각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실제 남아 있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가까운 친구, 배우자, 이웃 정도의 최소한의 유대감, 소속감을 지키고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80대에 들어서는 유대감과 소속감을 주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떠나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마치 청소년기에서 아동기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세상은 너무 변해서 오히려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아동기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과 같다, 그때가 되면 나를 보호해 줄 부모님이 없다. 그때까지 남아있는 금융자산만이 나의 생존과 안전을 유지해 준다. 지적자산인 지혜마저 너무 빠른 사회변화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쓸모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노년이 되기 전에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왔던 세상을 다시 떠나는 마지막 단계는 아동기에서 유아기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아동기부터 익혀서 지금까지 잘 사용해왔던 세상과의 상호작용 방법이 기억에서 하나 둘 사라지며 순수한 자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매슬로 욕구 5단계 중 가장 아래인 생리적 욕구 충족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이리라. 우리가 영아기 때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감각을 통해 기억속에 저장된 정보로 세상과 자아의 구분을 시작했던 것의 받대로, 이 마지막 단계동안에 우리는 나와 세상의 존재를 알게 해 줬던 그 기억과 감각마저 잃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갓 태어났을 때처럼 세상과 자아의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물아일체에 가까와지고 최종적으로는 세상과 나의 경계를 감지하는 기능을 제공했던 신체가 동작을 멈추면서 처음 세상에 왔을 때의 영혼으로 다시 돌아가 물질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서 봤을 때 매우 찰나에 그 수많은 영혼이 동시에 이 세상에 오게 되는데, 우리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순차적으로 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 간격은 우주 먼지 티끌보다 작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 크게 보여 영원한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영혼들이 순차적으로 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무작위로 왔다가 무작위로 떠난다. 이 모든 것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다.
세상을 사용하는 방법은 거기에 왔을 때 감각을 통해 배우고 기억할 필요가 있지만 거기서 떠날 때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억을 가지고 가봐야 쓸데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체도 그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한 것일 뿐, 세상과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필요 없다. 그 기억과 신체가 동시에 왔다가 동시게 가면 좋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기억이 먼저 사라지기도 하고 신체가 먼저 멈추기도 한다. 그래봐야 찰나의 순간 차이이다. 세상은 그렇게 효율적이지 만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