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위에 선 위험한 사람들
그냥 사는 이야기
한국에서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학을 졸업하는 취준생들에게는 부러운 것 일 수도 있다. 요즘엔 트렌드가 바뀌고 있어 대기업도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흉내를 내곤 하지만 대기업이 그리 빨리 바뀌지는 않는 듯하다.
대기업은 플랫폼이다. 내가 가진 기술하나만으로는 서비스를 만들어 운영하거나 상품을 내다 팔아서 수익을 낼 수 없지만 대기업이라는 플랫폼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고 나는 내가 할 줄 아는 한 가지만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회사가, 매니저가 알아서 해준다.
이런 플랫폼은 프랜차이즈 치킨집과 동일하다. 프랜차이즈 사업에서는 본사에서 주는 재료와, 프로세스, 브랜드, 마케팅 리소스를 가져다 쓰면 되고 나는 전체 사업에서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로 해결되지 않는 지역 마케팅과 노동력 부분을 쓰면 된다. 그러면 멋진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질 수 있다.
대기업의 부장은 이런 멋진 '사장'과 같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예산과, 프로세스, 브랜드 위에, 직원을 고용하고 한 가지 분야에 대한 것만 책임진다. 상품 개발하는 과정에서, 상품기획만 하던가, 디자인만 하던가, 설계만 하던가, 생산조립만 하던가, 판매만 한다. 이런 회사들은 규모의 경제로 막대한 자본을 운영하고 있고 회사 복지가 사회복지 이상이 되도록 해놓아 사람들이 모여들게 만든다. 일종의 일자리 마케팅인 것이다.
그런 부장 밑의 직원이 알아서 기어 다니는 것이나 임원 밑의 부장이 알아서 기어 다니는 것은 부장이나 임원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권한이나 리더십 때문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회사 복지와 연봉 때문이며 브랜드 때문이다. 부장이나, 팀장이나, 임원은 다른 곳에 가도 구할 수 있다.
회사에 오래 있다 보면 그런 플랫폼이 제공해주고 있던 능력이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회사를 나와서도 아랫사람과 협력회사가 알아서 굽신거려 줄 것을 기대하다 망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나마 빨리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게 되더라도 어느 세월에 그런 능력을 그 나이에 다시 얻어 낸단 말인가.
부장이 회사와 1:1로 계약해서 일하는 프리랜서가 아니라 그냥 직원인 이유는 마찬가지로 임원 밑에서 일하며 사회복지보다 더 좋은 회사의 복지를 받기위해서 임원의 권력에 복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물론 임원도 연봉이라는 미끼에 걸려 사장과 회장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굽신거리며 직원들의 온갖 욕을 대신 받아내야 하는 자리이다.
이런 대기업의 직원들은 배달 플랫폼 위에서 일하는 라이더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밖에서 마케팅, 상품, 서비스개발, 판매까지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하면서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플랫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입시강사도 사실 플랫폼 위에서 일한다. 교실과 학생을 공급하는 학원이라는 물리적 플랫폼뿐만 아니라, 떨어트리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입시 플랫폼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직업이기도 하다. 마치 위험을 판매하는 보험회사와 같이 입시탈락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재해를 교육부가 제공하고 대학교는 직업교육이라는 보험을 팔기위해 구직실패라는 재해를 판다. 입시강사는 이러한 입시제도와 대학이라는 커다란 플랫폼 위에서 보험업을 하고있다. 이 두 플랫폼이 없다면 입시강사가 생존할 수 있을까?
프로게이머도 정해진 게임소프트웨어 자체, 관객을 끌어모아 수익을 올리는 게임에이전시, 광고효과를 노리는 후원기업이라는 플랫폼 위에 존재한다. 이들 없이는 프로게이머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른 전통 스포츠보다는 그 역학관계가 보다 심플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와 게이머 이 두 시스템만으로 게임은 진행될 수 있으니.
작년 나는 Toptal이라는 리모트잡 플랫폼에 가입했다. 이 플랫폼에서는 전 세계의 회사에서 원격으로 싼값에 일해 줄 사람을 쉽게 찾게 해 준다. 물론 구직자들도 원격으로 일하기 때문에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보다 쉽게 일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동일한 직종이 국가마다 다른 연봉을 받는 것을 감안할 때 같은 기술이라면 아무래도 1인당 GDP 가 낮은 국가에서 일하는 구직자에게 일감이 더 가기 때문에 희망 시급을 지역에서보다 낮게 잡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면 지역에서 다음 일감을 찾기 전 공백이 있다면 낮은 시급이라도 그 공백을 메우는 게 유리하다. 물론 난 아직 그런 긴 공백기간이 없어 Toptal에서 일거리를 구해 본 적은 없다.
디지털 플랫폼은 물리적 거리라는 장벽으로 인해 생기는 정보희소성, 접근성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구인을 하는 입장에서 보다 싼 서비스를 쉽게 찾을 수 있어 값싼 노동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며 경쟁해야 하는 시장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미국에 있는 IT 근로자는 미국 내의 IT 근로자와만 연봉경쟁을 했지만 이제는 중국과 인도에 있는 IT 근로자와도 연봉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기술의 격차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나 같은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이다. 기획, 디자인, 개발, 생산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각각의 직군에 전문성이 있는 그러면서도 가장 저렴한 국가에서 인력을 구하게 된다. 한국인 디자이너가 베트남 디자이너 보다 확실히 뛰어나지 않은 한 디자이너 잡은 베트남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미 중국의 인건비도 비싸니..
그래서 플랫폼에 의지하는 부분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내 기술과 지식의 폭을 넓혀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동일 직종 노동자와 견주어 더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연봉을 무한 정 줄일 수 없다 내가 베트남이나 필리핀으로 가서 살 것이 아닌 이상. 때로는 플랫폼이 필요 없이 순수히 자신의 기술만을 팔아 수익을 올리는 배관공이나 전기기사가 되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기까지 한다.. - 물론 이곳에서는 배관공이나 전기기사는 자격증이라는 법규의 플랫폼 위에서 일하고 있다. 심지어 사냥을 해서 먹고 살려해도 총포자격증이 필요하다. -
사실은 대부분의 이런 플랫폼 위에서 살고 있지만 플랫폼이 주는 환경이 영원한 것처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플랫폼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바뀐다. 사라지기도 한다. 플랫폼이 없다면 기차에 쉽게 오를 수 없다. 나를 포함해서 이런 플랫폼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플랫폼이 없는 상황을 훈련해서 기차에 쉽게 오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1년 뒤에 계약이 종료되는 것을 아는 계약직보다 언제 계약이 종료될지 몰라 준비하지 못하는 정규직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난 의도적으로 나의 정규직 종료일을 정해 놓는다. 의도적으로 플랫폼을 치워버리는 거다. 모기지 대출 때문에 안정적인 정규직이 더 안전하지만 나만의 정규직 종료일을 정해 놓으면 미리 준비하여 공백 없이 또 다른 정규직을 이어 갈 수 있다.
얼마 전에 난 이렇게 플랫폼을 치워버리는 민방위 훈련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플랫폼 위에 올라와있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일자리가 참 마음에 든다. 그래도 난 2년 후 민방위 훈련을 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