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이스댕 Mar 16. 2024

그러면 이제 일찍 죽어야 하나?

그냥 사는 이야기

태곳적 사람은 자연시스템에 완전히 의존해 왔고 이후로 자연에서 배운 것을 기억 속에 기록해 왔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서 내장 기억 장치의 부족한 한계를 채워왔다.

자연에서 얻어내는 것은 정보뿐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보통 당장 소비해야 하는 것이지만, 통조림처럼 다음세대에 까지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저장기술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지만 다음 세대도 그런 식으로 음식을 저장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지식과 지혜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쌀농사를 잘 지으려면, 농부 아버지의 기억 속에 수십 년간 쌓아온 기후, 병충해, 농작물에 대한 빅데이트를 잘 내려받아야 했다. 그래서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복잡한 쌀농사를 짓는 농경사회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그 부모가 가진 빅데이터에 자식들이 평생 동안 접속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경로였고 '효'로써 그 연결을 강화할 수 있었다. 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모가 가진 빅데이터를 활용할 필요가 적은 밀농사나 수렵을 생계로 한 지역에서는 '효'란 개념이 그리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당장 써먹을 정보를 기억도 해야 하지만, 다음 세대에도 유용한 정보는 그것을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자손이 그 정보를 필요로 하고 써먹을 수 있을 시점까지 부모가 살아 있으면서 전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손이, 더 정확히는 자신의 유전자가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예로 자식을 돌보는 기술이 있다.  이 정보는 부모의 손자가 태어날 때야 쓸모있어지게 되며 그 손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쓸모가 있다. 그래서 20대 후반에 결혼하는 여성의 경우 그 자식의 자식이 성인이 되는 때, 즉 그 여성이 80대가 될 때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의 양육정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농사와 수렵정보는 그리 오랜 기간 동안 전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정보의 저장소인 남성의 수명이 여성보다 짧은 것이 설명이 된다.


이 모든 걸 생각해 보면, 우리의 수명은 자손에게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으로 정해진다는 중요한 가정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가정하고 나면 이제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묻지 않는다. 유튜브의 백 선생이 다 가르쳐준다. 백 선생이 죽고 나서도 나는 유튜브에서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유튜브에는 옛날이야기가 넘쳐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은 걱정 없이 유튜브에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참, 요즘은 아마존의 인공지능 시리나 알렉사가 간단한 옛날이야기는 랜덤으로 들려줄 수 있다.


우리 농사꾼 부모들이 알고 있던 쌀농사에 관한 노하우는 이제, 기후변화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변화된 그 기후와 비슷한 기후를 가진 다른 나라의 농사정보가 더 유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농촌 젊은이들이 필리핀의 농부들에게 '효'를 다 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 정보는 365일 24시간 접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도시에서 귀농한 젊은 농사꾼이 더 이상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르신에게 농사에 대한 지혜를 얻어내야 하는 상황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지혜를 저장할 문자가 없는 부족의 족장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매우가 가치가 있어 그 지혜를 가진 족장은 존경받아 마땅했고 그 지혜를 가장 잘 물려받은 그의 자손마저 존경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앞으로 정보저장 비용이 싸지고 용량이 늘어나며, 인공지능 음성인터페이스 등 정보 입출력이 쉬워지면 많은 정보들이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기계' 속에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보는 시공간 물리적 제약이 없어서 쉽게 복제되며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운명인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가치가 줄어들 것이다. 마치 아날로그 카메라보다 디지털카메라로 만든 사진의 가치가 현저히 줄어든 것처럼, 그리고 택시기사가 알고 있는 머릿속의 지도는 카카오맵 덕분에 더 이상 택시기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치가 아닌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60세에 은퇴할 수 없다. 왜?,  다른 곳에서부터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지식을  60세가 넘은 나에게 '공경'과 '존경'을 지불하고, 따뜻한 공간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면서 얻고자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화보다 우리의 신체는 물리적 제약으로 훨씬 느리게 진화한다. 이제 외부에 있는 기계적 기억용량의 증가로  우리가 가진 기억 속의 지식이 쓸모 있을 수 있는 기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우리의 수명은 거기에 맞추어 빠르게 줄어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지혜를 제공할 수 없는데 어떻게, 공경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옛날에는 그런 세월에 걸쳐 쌓은 지혜가 학자나 연장자의 기억에 접속해야만 얻을 수 있는 희소성 있는 것이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게 된다. 나이 먹은 나에게 희소한 자원이란 없을 것이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내가 70대가 넘어서면 유전적, 사회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별로 없게 된다. 다만, 자아성취의 욕구 차원에서 뭔가 더 해내고 싶어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우리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정보와 지혜들은 실리콘칩들로 옮겨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들로 통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편한 접속창구인 인공지능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또는 그 인공지능(미래의 신)과의 접속을 관리하는 신 브라만계급(인터페이스)들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그 브라만 계급은 누가 될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위계적 지식과 경쟁적 지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