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이스댕 Jun 23. 2024

상대적 스펙트럼

세상 모든 가설




대학교 때였나? 나랑 체구가 비슷한 같은 과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학년 초반에 나와 그 친구를 헛갈려하곤 했다. 내 눈엔 그 친구랑 내가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헛갈려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눈엔 세상에 있는 모든 백구들은 똑같이 보인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두 백구를 바로 옆에 놓고 비교하면 다른 점이 있겠지만. 대학교 때 친구들이 나와 그 친구를 헛갈려했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되긴 한다.


난 안면인식 장애가 약간 있다. 그래서 이름과 얼굴 매칭이 잘 안 되고, 특히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 간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전체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그 느낌을 인식하는 미술분야에서의 관찰기법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런던 히드로 공항에 처음 내렸던 기억이 있다. 내리는 순간 시각적인 다채로움에 정말 새로운 기분을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 인지해야 할 스팩트럼이 확 넓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서로 달랐다.


인도인의 컬러풀한 전통차림, 아랍사람들의 무채색 옷, 무광택의 검은 곱슬, 창백한 미색, 금발, 흰색머리, 아시안인의 윤기 나는 검은색머리,  가늘고 긴 체구에서부터 크고 의자가 부서질 듯한 엉덩이를 자랑하는 체구까지, 심지어 코나 눈의 모양과 크기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달라서, 마치 시각장애인이 처음으로 특수안경의 도움을 받아 세상의 모습과 다채로운 색깔을 경험하는 순간과 같았다.


그렇게 일 년을 인종의 종합선물세트인 런던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당시는 KLM항공이 김포공항에서 국제선을 운행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기 위해 수화물 찾는 곳으로 들어서자 내 눈은 새로운 센세이션으로 넘쳐났다. 이전까지 한국에 살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 모든 사람들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에, 동일한 피부톤, 비슷한 체구, 무채색의 옷차림, 비슷한 모양의 여행가방 들...


지난 30년간 느껴보지 못한 한국인의 동질성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고 그들과 다시 섞여 살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이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얼마나 모두 똑같아 보였던가? 그 30년간 나는 그렇게나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 하나하나를 구별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세상의 서로 다른  두 곳을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단일 민족인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 건물, 출판물, 아이디어들은 유전적으로 훨씬 먼 인도인이나 서양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그것들에 비해 폭이 좁다는 것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폭이 좁다는 것이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의 양이 작다는 게 아니다. 좁은 스팩트럼 안에서도 밀도가 높아 폭넓은 스팩트럼이 포함하는 정보와 동일한 양을  다룰 수 있어 더욱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단일 민족인 우리는 섬세한 시각과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빨간색의 종류만 봐도 얼마나 많은지 보면 알 수 있다. 베트남의 미에우라는 소수부족은 초록색을 구분하는 백 가지 이상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가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평생을 거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정해져 있다는 거다. 물론 개별적 차이가 조금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인종이나 민족 간의 평균을 비교해서 그들이 처리하는 정보량은 대동소이하다는 거다. 예를 들어 인도인은 일상적으로 입는 옷에 매우 다채로운 색과 패턴을 사용하는 반면 한국, 일본인은 절재 되고 중성적인 색을 계절에 따라 변화시키는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미묘한 차이에 반응한다.


이러한 섬세한 정보처리 능력 덕분에 동북아 사람들은 섬세한 재료를 다루는데 뛰어나다. 반도체, 종이, 섬유, 피부성형, 공예, 요리와 같은 것들이 아시아에서 뛰어난 수준을 보이는 이유이다.  한국인이 쫄깃한 음식이나 건더기가 있는 음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한 탄성이나 단일 물성을 지닌 음식 재료들이 섞여 입안에서 식재료가 잘 인지되는 요리를 좋아하는 서양인과 다르게, 냉면, 떡, 오징어와 같이 한번 씹는 동작에서 힘을 줄수록 묘하게 변하는 탄성정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음식에 대해서 만큼은 스펙트럼의 폭에서도 아시아인이 서양인의 폭을 넘어선다. 아마도 그건 미묘한 차이의 식재료 물성을 인지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사용가능한 식재료의 폭이 넓어져서 아닌가 한다. 음식에서 만큼은 아시아인이 스펙트럼 폭과 미묘한 다양성에서 모두 많은 양의 정보처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가설이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다차원 감각 같은 거 말이다.




해외문물 받아들이기 차원에서 근대 아시아인들이 개방성에서 부족했던 이유는 이 스펙트럼의 폭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많은 정보처리를 내부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데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펙트럼 밖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을 인지하고 정보를 처리하는데 추가적으로 더 사용할 에너지가 없었고, 덕분에 외부에 있는 서양문물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배척하게 되었던 것 같다.


외부인과 문화를 알고 받아들이기고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내부인들과의 상호작용에 필요했던 만큼의 미묘한 정보들이 필요로 하지만 그런 수준의 차이를 인지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경험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그럴 기회도, 시간도 부족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어디나 외국인 차별이 있지만, 한국과 같이 차별이 심한 곳도 없다. 다만, 글로벌화 덕분에 익숙해져서 표현을 하지 않을 뿐 심리적 차별은 여전하다.


(스펙트럼의 밀도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다양성 스펙트럼의 폭에서는 서양을 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 서양의 제국주의가 인도아시아, 중국까지 쉽게 접수한 이유는 그들은 스펙트럼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아프리카, 인도, 중국, 남아시아 등 그들이 지배하려고 했던 지역에 있는 수많은 민족 간의 섬세한 차이를 다루는 영역에서는 인지적 용량을 적게 할당했고 그래서 거기에 인지적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떠난 곳에는 항상 자로 그은 듯한 직선으로 분할된 비인간적이고 비민족적인 영토 분할이 남아 있는 것이 이들이 얼마나 복잡 미묘하고 다 차원적인 민족, 언어에 대해 이해하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았는지 말해 주고 있다. 그러한 트렌드는 근대, 현대로 오면서 더욱 강화된 듯하다. 정치적 국경이 아니라, 경제와 지식의 국경이 불 분명해지면서 그들의 생활 속에는 자신과 다른 민족과 언어가 뒤 섞여있게 되고 그들과 어쩔 수 없이 상호작용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점점 더욱 에너지 낭비가 되어 가고 있다. 다양성 스펙트럼 폭이 넓어질수록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경제적 탈퇴를 선언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스펙트럼을 벗어난 다양성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보수계층의 목소리가 있다. 세계화가 더욱 심화되면서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 덕분에 섬세했던 대화의 방식이 단순화되어 섬세한 대화를 통해 발생 가능한 문제들을 걸러주던 시스템을 잃어가고 있다. 다 민족 국가 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사회 문화적 시스템하에 통치하려 했던 영국영향력 아래의 국가들 일 수록 이렇게 미묘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미묘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떨어지는 나라 중 하나가 뉴질랜드이다. 뉴질랜드야 말로 다 민족 국가이다. 아프리카 내 어느 한지역의 다민족, 중국 내의 다민족, 인도 내의 다민족과는 수준이 다른 인종과 문화의 폭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각각의 민족 안에서는 스펙트럼의 밀도가 매우 높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민족간의 스펙트럼 폭도 매우 넓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폭도 넓고 밀도도 높은 문화적 스펙트럼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소비한다. 그러다 보니, 문화적 정보(주로 다른 인종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의 요구사항을 이해하는 것, 또는 그들의 리츄얼을 이해하고 배워서 서로 동질감을 주기 위한 행동들)를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 쏟을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 그 '다른 부분'이란 품질, 효율성, 속도와 같은 한국에서는 당연시되는 것들이다.


한국에서는 품질, 효율성, 속도가 너무나 풍부한 자원이다 보니 모든 서비스와 제품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격이 너무나 싸야 한다. 주문한 제품이 배달되는데 1주일 걸린다면  Temu와 같이 싸기라도 해야 한다. 만일 일반 가격과 같다면 아침에 주문한걸 저녁에는 배달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그렇지 않다. 주문할 때 제품설명과 동일한 기능을 포함하는 제품을 받는 것만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게 1주일 2주일 걸리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그대로 잘 전달되는 것 만으로, 주문한 제품이 상처 없이 집까지 도착해 주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다.


뉴질랜드는 몇 km의 도로를 확장해서 새로 만드는데 1년 이상을 잡아야 한다. 그나마 비 올 때 빗물이 잘 빠져나가고 도로가 파이지 않는 상태로 만들었다면 성공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기에 작업하는 인부들은 다양한 인종들의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품질에 대한 기준,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 동일한 요구사항에 대해 동일하게 이해시키는 것과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품질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실수에 관대 한편이다. 서로 간의 이해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실제 일을 실행해서 결과물을 봐야 알 수 있고 그래야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원하는 대로 되는지 알 수 있어서 대부분 잘못 설치되는 시설물을 다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정해진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시작 시점은 있지만, 끝나는 시점은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공사들은 시간당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로 이어져 있는데, 공사비용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도 이제 다문화, 다민족 국가로 변하고 있다. 이미 오랫동안 다민족, 다문화와 섞여 살아야 했던 영국인과 그 후손들과 달리, 한국인은 이런 생활과 비즈니스를 이제 접하고 있고 그 충격은 상당히 클 것이다. 식당에서 필리핀인 직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품질이 낮아질 것이고, 중국인들이 일하는 현장에서는 소음이 문제가 될 것이며, 독일인 엔지니어가 일하는 제조사에서는 고객의 피드백을 재빠르게 반영해서 설계를 수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서비스, 제조, 건설, 컨설팅 사업의 프로세스는 세밀한 요구사항과 품질을 빠르게 이해시킬 수 있는 단일민족의 단일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기업 중에서도 사람에 문화보다는 그런 프로세스를 시스템과 플랫폼으로 만들어 놓은 곳만이 다양한 문화의 직원들을 국내 인력으로는 부족한 노동력과 높은 임금을 해소하면서도 서비스와 제품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기업들도 아직 잘 해내고 있지 못하는 부분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창의적으로 문제해결하거나 경쟁적 에코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같은 진짜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다이내믹을 섞고 이용할 줄 아아야 가능한 것들이다.


미국은 영국과 다르게 다민족 국가로서 스펙트럼의 폭과 밀도를 모두 잘 이용하고 있다. 아마 자유경쟁 경제체제가  어떤 곳은 정보의 밀도를 낮추되 속도를 올리고, 어떤 곳은 정보의 밀도를 높여 정교함을 높이는 것을 경제적 보상으로 컨트롤 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개인차원에서는 무한 경쟁에서 도태되어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어떤 선진국 보다도 높은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어느 나라에 살던, 내가 다루어야 하는 정보 양과 발생하는 문제의 양은 스펙트럼의 폭과 밀도에 상관없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미묘한 언어와 인간관계의 정보를 다루는 게 피곤하다. 도시의 복잡한 네온사인과 삼성역 주변에 걸어 다니는 화난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싫었다. 그런 것들이 나의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나는 사물과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사람과 세상의 원리를 더 정교하게 이해하는데 정해진 에너지를 쓰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사물과 시스템이 정교하지 않고, 세상의 원리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세상 어디든, 내가 써야 하는 에너지양은 동일하다. 스펙트럼의 어떤 부분에 에너지를 쓸 것인가만 다를 뿐.

작가의 이전글 그러면 이제 일찍 죽어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